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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잡담 Jul 29. 2023

광화문 광장 장광설

16호_건축과 시간_특별잡담

“광화문을 좋아하시나요?”


사실 광화문에 대한 호불호를 묻는 건 속임수에 불과하다. 바꾸어 질문해보자. “방금 당신이 떠올 린 광화문은 무엇인가요?” 앞의 물음에 높이 18.93m, 폭 23m의 거대한 ‘문’을 떠올린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광화문을 손으로 감각할 수 있는 단일한 실체라기보다는 세종로 와 광화문 광장을 아우르는 상징으로 인식할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광화문이 바로 그런 존재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정치와 외교, 행정의 중심지였던 광화문은 제 위상에 걸맞게 끊임없이 밀도를 높여왔다. 하지만 광화문을 진정 의미 있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궁궐과 빌딩 사이 텅 빈 땅 광장이다. 옛 궁궐이 우리의 지나간 시간을, 고층 빌딩이 우리의 진행 중인 시간을 표상한다면 광장은 둘 중 그 무엇으로도 분류되지 않는 이중의 공간이다. 광장은 오히려 과거와 현재 사이를 중재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오롯이 드러낸다. 그 비어있음으로 인해 광장은 역사의 한순간에 박제되지 않고 역동성을 품은 ‘시간’ 그 자체가 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번 호 주제인 ‘건축과 시간’을 이야기하기에 광화문 광장보다 더 적절한 공간은 없으리라. 광화문 광장은 조선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변화를 겪었고 2018년에 발표된 계획에 따라 또 한 번의 새 단장을 앞두고 있다. 광화문의 변천사와 다가올 미래를 함께 톺아보자.




육조거리 혹은 광화문 앞길


 광화문 광장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시계를 돌려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조선이 건국된 지 채 4년이 되지 않은 1395년, 정도전은 조선의 수도 한양을 만들라는 태조의 명을 받아 조선 왕조의 정궁(正宮)인 경복궁을 세우고 그 앞에 임금이 드나들기 위한 광화문과 임금의 행차를 위한 넓은 길인 육조거리를 조성한다. 이 육조거리가 바로 오늘날 광화문 앞 큰길, 세종로의 효시다.


 그렇다면 육조거리에는 왜 육조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일까? 그 답은 1395년 9월 29일 자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에 따르면 ‘광화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 각 관청’이 있었고 여기서 언급된 조선의 중앙 행정 기관 육조(六曹)가 바로 육조거리라는 명칭의 기원이다. 사실 조선 시대까지 이 길에는 통일된 명칭이 없어 육조거리, 육조 앞길, 궁궐 앞길, 광화문 앞길 등의 이름이 혼용되어 쓰였다고 한다.




18세기 후반 그려진 한양의 도성도를 자세히 살펴보자. 경복궁과 광화문을 잇는 축은 관악산과 북한산을 연결하는 축과 거의 일치하는데, 이는 풍수지리에 따라 도시를 계획한 결과로 이 결정에는 조선 초기 승려였던 무학대사가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관악산은 불의 산(火山)이기 때문에 관악산과 북한산을 축으로 하면 도시가 화를 당하게 된다.” (허윤희. <광화문 앞 큰 길이 경복궁 배치축과 틀어져 있는 이유는?>)고 주장했고 그 결과 육조거리는 관악 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 광화문 앞 130m 구간 이후로 중심이 동쪽으로 약간 틀어진 배치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1592년 임진왜란 시기 광화문은 화재로 첫 번째 소실을 겪는다(첫 번째라는 표현이 암시 하듯 광화문의 수난은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광화문이 사라진 후에도 육조거리는 중심 관청가로서의 역할을 다하며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는 1865년에 이르러 비로소 광화문은 복원된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수난의 역사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경복궁을 떠난 1896년 이후 방치되던 육조거리는 1910년 한일 강제 병합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겪는다. 경복궁 내에는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고 광화문은 청사에 맞춰 재배치되었으며, 육조거리에는 광화문통이라는 새 이름이 붙여진다. 거리는 확장되고 직선화되면서 식민통치에 유리한 공간구조로 변경되었는데, “이러한 공간적 변화는 (…) 전통적 도시공간을 해체하 고 새로운 재현체계에 따른 공간적 질서를 강제하는 물리적 행사였다.” 식민통치의 일환으로 광화문통의 중심에는 도쿄를 상징하는 나무인 은행나무가 심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은행나무들 죽지도 않고 잘 살아있으니, 머잖아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광화문통은 세종로라는 새 이름을 얻는다. 새 이름과 함께 이제는 새  출발하나 싶겠지만 혼란스러운 격변의 시기였으므로 개칭 외의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기 힘들었고 도시는 일제가 만들어 놓은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된다.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며 광화문은 포탄에 맞다 또다시 불길에 휩싸였고 그 결과 문루가 통으로 소실된다.



박정희 정부의 광화문 재건, 누구를 위한 복원인가


폐허가 된 광화문의 복원은 거의 20년이 지난 1968년, 박정희 정부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하지만 복원을 통해 진짜 역사를 되찾을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는 금물이다. 박정희 정부가 광화문 복원 사업을 ‘합일협정으로 들끓는 반일 감정을 잠재우기 위한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활용하려 했고 결국 복원된 광화문이라는 건 철근과 콘크리트로 어설프게 외양만 흉내 낸 것에 불과했다. 물론 복원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다지만, 이건 너무 엉터리가 아닌가.



그래 문은 그렇다 치자고. 그럼 세종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종로는 사정이 더 나빴다. 광화문 재건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 게 뻔한 육조 거리 복원은 생뚱 맞은 충무공 동상 건립으로 무마되었다. 심지어 세종로의 폭을 기존 58m에서 100m로 넓히기 위해 남아있던 조선의 마지막 흔적들은 하나둘 철거된다. 특히 삼군부 청헌당은 광화문에 남아있는 가장 유서 깊은 건물 중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스펙터클을 보여줄 수 있는 웅장한 건축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전된다. 그러니 정부의 광화문 사업이 진정 시민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시민의 광장, 민주주의의 터, 오염되고 있는 이름과 미래

우리가 지금 마주한 광화문의 모습은 노무현 정부 말 추진되어 2009년 비로소 완성된 것으로 2009년 7월 말 광장이 개장했고, 2010년 콘크리트 광화문이 나무 광화문으로 재건되었다. 그러니 이렇게 완성된 광화문은 건축학도식 표현을 따르자면 ‘광화문’, ‘광화문_최종’, ‘광화문_최최최종’ 인 셈이다. 앞서 언급했던 세종로 스물아홉 그루의 은행나무들은 광장 조성 과정에서 베이…지 않았고 정든 시민들의 의견에 따라 옮겨 심겼다. 총독부 건물은 부수었어도 나무는 살려 둔 걸 보면 생명이란 그만큼 소중한 게 아닐까 한다. 비록 생명의 소중함을 두고 사람들이 격돌하는 곳 역시 광화문이지만.



영원한 건 절대 없다고 광화문은 또 한 번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2020년 9월 28일 서울시는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광장의 서쪽 도로를 없애 광장을 확대하는 이 계획은 박원순 전 시장이 지방선거를 2개월 앞둔 2018년 4월 발표한 계획안의 연장선으로, 육조거리 역사를 훼손하는 졸속 추진으로 세간의 비판을 받았다. 당시 상대 후보였던 바른미래당 안철수 전 대표 또한 “전시성 사업에 1000억대 시민 혈세를 들이겠다고 한다.”, “막대한 교통체증이 빚어지고 말 것”, “선거법 위반 혐의가 짙다.”(곽재훈. <박원순의 광장 확장 비판 안철수, 대선 때 공약 보니…>)며 비판을 가했다. 물론 그 역시도 19대 대선을 앞두고 광화문 광 장 확대, 보행거리 조성 등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 사업 계획을 밝힌 바 있지만.


오늘날 광화문 광장은 이념 갈등이 물리적으로 현현되는 전쟁터가 되었다. 처음 광화문 광장에 촛불이 켜진 바탕에는 2002년 장갑차 참사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미 정부에 항의하는 인권에 대한 보편적 공감이 있었다. 그러나 2008년 광우병 파동 항의, 2009년 노무현 대통령 서거, 2014 년 세월호와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등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거치며 광화문은 차츰 정쟁의 터-정쟁터로 변모했다. (여기에는 훨씬 복잡한 이데올로기 갈등의 역사가 얽혀있으나 필자의 능력과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내용이므로 생략한다) 심지어 2014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 이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 농성을 펼쳤을 때, 일부 보수단체가 폭식 농성으로 맞불을 놓으며 인권 자체에 대한 훼손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갈등은 격화되어 광장의 집회 빈도는 점차 높아지고 있고 엄밀히 말하자면 각각의 주목도는 떨어지고 있다. 결국 청년들에게 광화문은 시민 과 역사의 공간이 아니라 ‘1호선에서 볼 법한 희한한 사람들이 태극기 집회 하는 곳’, 내지는 ‘주말이면 길 막혀서 피해가야 하는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앞서 살펴보았듯 광화문 광장 재구조화를 둘러싼 갈등의 기저에는 첨예한 정치적 마찰이 자리한다. 이명박 시장의 성공적인 청계천 복원 사업 이후로 이를 벤치마킹한 오세훈 시장과 박원순 시장은 마치 광화문 광장의 진짜 주인을 가리기라도 하려는 듯 끊임없이 손을 대었으며, 여기에는 “도시공간을 민주주의 계승자를 표방하는 정치적 정통성의 확립에 이용하려는 의도”(송은영. <광화문, 현대사의 현재진행형 공간>(2018))가 다분하다. 표 계산을 위한 정치 공방이 공론장을 가득 메울 동안 정작 시민과 역사는 종적을 감춘다. 많은 시간 이 흘렀건만 우리 정치는 콘크리트로 광화문을 찍어내던 1968년으로 끊임없이 회귀한다.



광화문 광장이 미래를 향해 첫 삽을 떴지만, 이 역시 광화문 최후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광화문 광장이 비어있음으로써 진정 시간을 품은 공간일 수 있었다면 앞으로도 몇 번이고 시대에 맞는 모 습으로 변화할 것이다. 물론 이 변화는 땅을 뒤엎고 바닥 돌을 새로 까는 물리적 변화에 한정된 이 야기는 아니다. 변화하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고 삶 속에서 광화문을 받아들이는 저마다의 방식이 지, 그것이 물리적으로 재현된 형태일 필요는 없다. 물리적 변화는 오히려 지양되어야 한다. 형태 가 시시각각 변화한다면 큰 비용이 낭비되는 건 물론이요, 우리조차 광화문 광장에 대한 사회적 합 의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표류하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하루빨리 광화문의 ‘광화문_진짜 최종’ 모습을 만나고 싶다.


도판출처

1. 국가문화유산포털 (www.heritage.go.kr)

2.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3. 서울역사박물관(museum.seoul.go.kr)

4. 광화문광장(gwanghwamun.seoul.go.kr)

일러스트 : 프로잡담러 P (PSJ)


참고문헌

조봉경. (2021). 광화문광장 조성 및 재조성 계획과정 비교 연구: 협력적 계획의 담론과 실제. 지방정부연구, 25(2), 131–156.

강난형, 송인호. (2015). 1960년대 광화문 중건과 광화문 앞길의 변화. 건축역사연구, 24(4), 7–18. 

손정목. (2005). 서울도시계획 이야기 2. 한울, 103-104, 165-168.

이순우. (2012). 광화문 육조앞길. 하늘재.

허윤희. (2010). 광화문 앞 큰 길이 경복궁 배치축과 틀어져 있는 이유는?

2021.09.30. 서울역사아카이브. 광화문통

송은영. (2018). 광화문, 현대사의 현재진행형 공간


 

 


  

  


게재 : Vol.16 건축과 시간, 2021년 가을

작성 : 프로잡담러 Z | IJ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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