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폴레옹 3세 치하의 파리, 벨 에포크 시대의 옷으로 갈아입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은 나폴레옹 3세가 황제로 군림하던 1853년부터 1870년까지 17년간 내내 지속된다. 당시 파리 규모는 루이 16세 때 보다 조금 더 컸다. 안에 새롭게 길을 낸 거리가 90킬로미터에 이르는데, 말 그대로 파리 전체가 공사로 어지럽게 파헤쳐지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파리의 외각으로는 점차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며 신도시들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구도심과 확장된 신도시들을 정리해서 새로운 아롱디스망으로 행정구역을 나눈 것도 오스만의 업적이다.
아래의 지도를 보면 파리 전체에 전방위적으로 도로 공사를 진행한 것뿐 아니라, 몽수리 공원과 몽소 공원을 조성했다. 붉은색은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 때, 오스만이 실행한 도시계획에 의해 확장된 라인이고, 푸른색은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에 패하고 들어온 제3 공화국에서 진행한 도로공사를 표시한 것이다.
루이 16세 때의 파리는 동-서의 길이가 7킬로미터, 남-북으로는 5킬로미터의 규모였다. 당시의 파리 규모를 짐작하게 할 수 있는 명확한 흔적이 당시의 도시 외각이었던 라인을 환상으로 지나는 북쪽의 지상철 2호선과 남쪽의 지상철 6호선이다. 이 라인을 따라서 루이 16세가 성벽을 쌓고 50여 개의 문을 만들어서 세금을 징수했다. 파리 시민들의 큰 불만을 불러온 이 세금 징수 문들은 지금도 몇몇이 남아있다. 아래 지도의 붉은 테두리는 루이 16세 때 세금 징수를 위해 벽을 둘렀던 경계로, 현재는 북쪽의 2호선, 남쪽의 6호선 라인과 일치한다. 검은 선은 이후 행정구역이 확장되어 지금 현재의 1구부터 20구를 이루는 파리의 경계를 나타낸다. 현재는 검은 라인을 따라 외곽순환도로가 놓여있다.
지금은 오스만의 도시계획 결과로 도시 전체가 당시 지어진 건물로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파리의 여러 지역에 조성된 공원들은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고, 확장된 넓은 도로는 자동차가 중심이 되는 현대의 도시 생활에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반면, 오스만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만은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파리를 현대화하는 것이 목표였다. 당시에는 역사 유적의 보존에 대한 개념이 희박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중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파리의 길과 건물을 밀어버리고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는 상황이었다. 6세기부터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 생제르망데프레 수도원의 성당도 당시의 도로정비에 의해 절단되고, 그 자리에 불바르(대로) 생제르망이 생겨났다.
(그림) 생제르망 데프레의 성당 모습 비교
특히 빅톨 위고는 나폴레옹 3세를 맹렬히 비판하여 오랜 기간 영국에서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로마시대의 유적인 아레나도 밀어버리고, 지하철과 건물이 새롭게 지어 올리려는 계획이 진행 중일 때, 빅톨 위고는 '역사가 없는 민족에게는 미래도 없다'라는 슬로건을 외치며, 아레나 파괴 반대 운동을 벌인다. 빅톨 위고가 1830년에 쓴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은 파리지엔들에게 허물어져 가는 노트르담 성당의 아름다움을 환기시켜, 복원 운동이 시작되는 단초를 만든다. 그는 파리라는 도시에서 중세와 고대의 건축 등 전통건축이 갖는 중요한 의미와 그 보존의 가치를 알아본 선지자였다.
빅톨 위고는 1832년 "파괴자들과의 전쟁(Geurre aux démolisseurs)"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건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쓰임과 아름다움.
쓰임은 소유주의 것이지만, 아름다움은 당신과 나, 우리 모두의 것이다.
때문에 건축을 허무는 것, 그것은 파괴자의 권한 밖의 일이다.
오스만의 파리 도시계획은 두 가지의 뚜렷한 목적하에 진행된다.
첫째는 좌안과 우안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기 위한 첫걸음으로 시테섬이 좌안과 우안을 원활하게 이을수 있도록 대대적인 정비를 한다. 사실 우안에는 왕궁이 있고, 시청이 있고, 시청 앞에는 나루터가 성행하고, 시청과 멀지 않은 곳에 상업의 중심인 시장도 있는데 반해, 좌안은 종교시설들이 많고, 중세 이후로 경제적 발전이 느렸다.
둘째는 중세의 도시가 가지고 있는 어둡고 비위생적인 구조를 개조하여, 빛과 공기가 통하게 하고, 좁은 길을 넓히고, 넓은 교차로를 만들어 흐름을 원활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길들에서 모일 수 있는 광장도 만들었다. 대표적으로 노트르담 성당 앞의 넓은 광장도 오스만의 도시계획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위의 지도를 보면, 위가 동쪽, 왼쪽이 북쪽으로, 노트르담 성당은 윗부분에, 아랫부분은 시테 궁이 자리하고 있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이 진행되기 이전의 모습인데, 노트르담 성당 앞에 협소한 오픈스페이스가 있고, 왼쪽으로 보이는 두 개의 다리는 파리시청과 시장이 있는 우안을 연결한다. 다리 위에는 빽빽하게 상점 건물이 지어져 있다.
지금도 오스만의 도시계획이 미치지 않은, 중세의 흔적이 남은 골목길들이 가끔 있기는 하다. 오스만의 도시계획이 파리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켰는지 극명하게 볼 수 있는 사례가 바로 시테섬이다.
아래의 지도에서는 시테 궁이 위쪽에 노트르담 성당이 아래쪽에 위치한다. 성당 앞에 성당 규모의 광장이 조성되어 있고, 성당 옆 구역을 제외하고, 다른 부지들은 모두 큰 규모의 건물이 새롭게 지어졌다. 시테섬과 아래 보이는 좌안을 연결하는 가장 넓은 생미셸 다리와 다리 건너서 생미셸 광장과 분수가 새롭게 조성되었다.
길을 넓히면서 토지구획을 정비하여 현대적인 집합주택을 짓는데, 돌로 된 입면, 청석돌 지붕, 지상층은 상점, 2층과 5층의 발코니, 최대 5-6층의 규모 등 건축 규율이 적용된다. 그래서 오스만 주택의 특징적 외관이 파리 전체에 질서와 통일성을 부여했다. 오스만 집합주택은 도시민들에게 편리하고 위생적인 주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가 조화롭게 어울리며, 이후에 지어지는 집합주택은 오스만 양식의 주거를 모델로 삼아 지어졌다. 그리고 현재에도 오스만 양식의 주거는 파리지엔들에게 인기가 높다. 당시의 부르주아 생활양식을 담은 주거공간은 현대에 지어지는 도심 집합 주거에 비해 공간이 넓고, 우아한 실내장식도 현대의 무미건조한 건물과 대조가 된다.
그리고 당시는 철도의 시대였다. 파리의 북쪽에는 북역과 동역이, 각 역과 연결된 스트라스부르 대로와 마젠타 대로, 동쪽에는 리용 역과 연결된 디드로 대로, 오스테리츠역과 연결된 생미셸 대로와 아라고 대로, 남쪽의 몽파르나스역과 포르 루와이얄 대로와 렌느 길은 오스만이 만든 대로들이다. 북서쪽의 생 라자르 역은 나폴레옹 3세가 건축가 가르니에에게 설계를 맡긴 오페라와 가깝고, 당시에는 유럽에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되고 당시 가장 큰 규모였던 르그랑 호텔(현, 인터컨티넨탈 파리 르그랑 호텔)이 1867년 세계박람회를 준비하며 지어진다. 이 그랑 호텔의 레스토랑이 유명한 평화의 카페이다. 이 그랑 호텔은 나폴레옹 3세와 황녀 으제니의 오페라가 정면에 보이는 스위트룸과 이 호텔을 이용한 빅톨 위고, 에밀 졸라, 모파상, 오스카 와일드, 막셀 푸르스트 등의 유명 작가들과 찰리 채플린, 세계의 정상들과 관련된 이야기도 흥미롭다.
루브르궁의 맞은편에 지어진 오르세 역도 세계박람회를 준비하며 지어진 역이다. 도심으로 들어오기 위해서 세느강변 가까이에 터널을 만드느라 당시의 기술력이 최대로 동원되었었다. 그러나 동력 기술의 발달로 기차의 길이가 점차 길어지며, 역이 제 역할을 못해, 한동안 방치되기도 했다. 르 꼬르뷔제가 이곳에 층고가 높은 호텔과 컨벤션 기능의 건물을 짓는 재개발계획안을 제시하지만, 다행히도 그 안은 채택되지 않았다.
지금은 미술관으로 리노베이션 되어, 많은 방문객들의 사랑을 받는 파리의 명소로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