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아련함과 살아감 補遺, 4.3 항쟁 3/3
미국과 이승만 일파가 기도하는 단독선거를 실력으로 저지하여 끝까지 조국의 자주통일과 생존권을 지키려는 제주민중의 항쟁을 진압하러 온 국방경비대 장병들은 대부분 농촌 출신이기 때문에 제주민중들의 격한 애국적열기에 부딛히자 전의를 상실하고 제주 민중들을 동정하여 오히려 협력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9연대장 김익렬 소령은
동족상잔은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하지 않으면 안 된다
라고 하며 쌍방의 화해 교섭을 호소하였다.
이런 김익렬 소령의 호소의 노력으로 유격대 대표 김달삼과 제주사태의 평화적 해결을위한 회담이 성사되었다.
유격대 대표 김달삼은 다음과 같은 4개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하였다.
1. 단독선거 단독정부수립 반대
2. 경찰의 완전 무장해제. 경찰토벌대의 즉시 철수
3. 반동 테러단체의 즉시 해산, 서북청년단의 즉시 철수
4. 피검자의 즉시 석방, 부당한 검거 . 투옥 . 학살의 즉시 중지
김익렬 소령과 김달삼 유격대대표의 회담결과, 양자간에는 일정한 타협이 이루어지게 되어 유격대는 4월 30일 오후 5시를 기해 무장해제를 할 것에 쌍방간 합의하였다.
그러나 미 군정의 개가된 미 군정청 경무부장 조병옥의 지시하에 경찰이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쌍방간 이루어졌던 모든 회담의 성과는 무산되고 말았다.
회담은 무산되었으나 국방경비대와 유격대와의 평화적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으며, 특히 9연대의 문상길 중위와 5연대 2대대장 오일균 등을 중심으로 유격대와 상호정보를 공유하며 협력하면서 경찰의 출동요청을 거부하고 엄정한 중립을 지키며 오히려 경찰토벌대의 횡포와 테러집단의 무자비한 살육행위를 비난하고 나섰다.
이에 당황한 조선의 군통수권을 가지고 있던 미 군정장관 딘소장은 1948년 5월초 토벌에 소극적인 김익렬 소령을 해임하고 적극적인 유격대 토벌작전을 지시하면서 제9연대장에 박진경 대령을 임명하였다.
박진경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명령하고 악질적 경찰과 서청등 우익 깡패집단과 협력하여 제주민중을 탄압하고 살육하려 하였다. 이런 박진경의 작전에 불만을 품은 문상길 중위와 손선로 하사 등은 병사 100여명과 함께 궐기하여 박진경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도처에서 경찰토벌대를 진압한 뒤 한라산에 입산하여 유격대와 합류하였다.
문상길 중위를 중심으로 한 9연대 장병들의 거사는 유격대의 전력을 크게 강화시키는 한편 전 제주도민을 열광시켰을뿐 아니라 국방경비대내에서 잇따라 애국적장병들의 동조세력을 끌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런 과정 속에서 5월 10일 단독선거는 제주도에서도 강행되었다.
제주 민중의 모든 역량이 단독선거 저지에 모아진 가운데 투표일 당일 읍사무소, 신한공사, 경찰지서 등이 습격되고 투표거부의 선전물이 온 거리를 뒤덮었다.
막강한 유격대와 각 지역의 자위 조직인 자위대는 각지의 선거사무소와 투표소를 습격하여 선거인 명부, 투표용지, 투표함 등을 불 태웠다.
제주도에서의 5.10 단독선거는 완전히 분쇄되었다.
대부분의 투표소에서는 아예 선거조차 치루어지지 못하였고, 투표가 가까스로 이루어진 지역의 투표함에는 단 몇표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당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제주도 투표율 70%는 완전 허위로 날조된 거짓말이다.
정부에서 발표한 5.10 단독선거 전국 투표율 93% 또한 전혀 믿을수도 근거도 없는 거짓이라는 사실도 입증되는 셈이다.
제주도에서의 단독선거의 좌절은 미국과 이승만 도당의 민족분열 음모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토벌계획 또한 국방경비대 장병들의 애국적인 토벌 방해공작과 1948년 10월 20일 제주도 진격명령을 받은 여수의 14연대의 봉기 등으로 많은 차질을 빚고 있었다.
미 군정의 전면적인 토벌작전은 군내 저항세력들이 어느정도 뿌리 뽑혀진 1948년 11월이 되어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미 군정 지휘하의 토벌작전은 유격대와 일반 주민이 거의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무차별적으로 잔인하게 전개되어 무고한 양민들의 숱한 희생을 불러왔다.
이승만, 조병옥, 신성모등은 제주를 초토화시킬것을 계획한다.
이승만과 조병옥의 명령에 따라 제주도 전 섬을 상대로 방화, 초토화, 소개작전을 구사하여 유격대의 근거지를 완전히 없애버리는 삼광작전, 불태우고, 죽이고, 굶겨없애는 삼진작전, 유격대건 아니건 무조건 집단학살하는 묻지마식 살육작전, 빨갱이 색출을 명목으로 한집한집 샅샅히 쓸어버리는 로울러 작전, 최대한의 살상을 지상목표로 삼는 몰살작전 등등 갖가지 악질적이고 반인륜적인 무자비한 오로지 살육만을 위한 온갖 작전방식이 다 동원되었다.
항쟁의 섬 제주도는 점점 피의 바다 속으로 잠기어 갔다.
제주 민중항쟁은 1949년 12월 유격대의 90 % 이상이 궤멸되었고, 200여명의 잔여 유격대는 한라산 깊숙히 숨어들어가 간간히 빨지산 투쟁으로 그 명맥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로 유격대의 조직이 남군유격대와 북군유격대로 다시 재건되어 적극적 활동을 재개하였다.
1956년까지 활동을 보였던 유격대는 1957년 마지막 유격대원 오원권이 구좌면 송당리에서 생포됨으로서 위대한 제주도민의 4.3 민중항쟁의 그 비극적 끝을 맺었다.
미 군정과 이승만, 조병옥의 지시에 의한 경찰토벌대의 살육작전에 의하여 희생당한 제주도민의 피해는 말이나 글로 다 표현할 수 조차도 없다.
1963년 조사된 제주도 당국이 발표한 사망자 수만도 80,065명이었다.
당시 제주도민의 인구가 26만여 명이었음 감안할 때 얼마나 많은 제주도민들이 군경의 강압적이고 악랄한 진압작전으로 희생되었는지 알 수 있다.
15,000 가옥의 방화, 소 78,000두, 말 22,000필, 돼지 29,000마리가 도살되었고 그외 약탈당하고 소실된 재산이나 곡물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