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뜻이 붓 앞에 있어야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간혹 논점이 흐려지거나 길에서 벗어난 방향으로 빠질때가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앞선 생각의 뜻이 약하기 때문에 헤매이게 되는것이다.
특히나 갑작스럽게 생각지도 않던 질문을 받는다면 답변이나 결과가 산으로 가기 쉽상이다.
오늘은 갑작스런 한달전, 40일전의 날짜가 나왔을땐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생각의 여유 없이 격앙된 말이 튀어나왔다.
잠시 생각할 시간을 벌어야 하는데 스스로 옥죄이는 행동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그 창피함에 머리를 들 수 없다.
늘 차분한 맘으로 행동하기를 원하지만 아직도 마음을 다스리기란 쉽지 않은 모양이다.
晋진의 王羲之왕희지는 중국 고금의 첫째가는 서성으로 존경받고 있다.
해서 ·행서 ·초서의 각 서체를 완성함으로써 예술로서의 서예의 지위를 확립하였다.
그가 붓을 들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 한 구절이 있다.
글씨를 쓰려는 사람은 먼저 벼루와 먹을 앞에 두고 정신을 모은 채 생각을 가라앉힌다.
미리 글자 형태와 크기, 기울게 쓸지 곧게 쓸지, 휘갈겨 쓸지를 생각해서 筋脈근맥이 서로 이어지게 하여, 뜻이 붓보다 앞선 뒤에야 글씨를 쓴다.
夫欲書者 先乾研墨 凝神靜思 부욕서자 선건연무 긍신정사
預想字形大小 偃仰 平直 振動 令筋脈相連 예상자형대소 언앙 평직 진동 영근맥상연
意在筆前 然後作字 의재필전 연후작자
- 題衛夫人筆陣圖後 제위부인필진도후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 사후 6년 뒤인 1576년에 완공되었다.
1575년(선조 7년)에 석봉 한호가 쓴 도산서원의 편액을 하사받음으로써 사액(임금이 직접 현판을 내림)서원으로서 명실상부하게 영남유학의 근거지가 되었다.
선조가 도산서원에 보낼 글씨를 쓰게 하기 위해 당대 최고 명필이자 아끼던 서예가였던 石峯석봉 韓濩한호를 불렀다.
선조는 한호에게 자신이 부르는 대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휘호하지 말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휘호하라고 말하면서 한 글자씩 부르기 시작했다.
院원, 書서, 山산 자를 이어서 부르자 한호는 마음을 모아 받아썼다.
마지막으로 陶도라고 부르자 비로소 한호는 자신이 받아쓰는 휘호물이 도산서원의 현판임을 깨달은 것이다.
선조가 이렇게 거꾸로 부른 것은 천하의 명필인 한석봉도 사액서원인 도산서원을 임금 앞에서 휘호한다고 말하면 마음이 옹졸해지고 붓끝이 떨려 현판글씨가 잘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흔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글자를 바꾸어서 부른 것이었다.
그러나 뜻이 붓 앞에 있어야 제대로 된 글씨를 쓸 수 있다는 意在筆前의재필전(意在筆先 의재필선)을 선조가 알았다면 지금보다 더 좋은 글씨를 휘호했을지도 모른다.
이 글씨를 쓸 때 한호는 33세였고 완전히 성숙한 자신의 글씨를 구사하던 시기는 아니었다.
이런 연유로 도산서원 현판 글씨의 마지막 글자인 陶도자를 보면, 좌부방과 도자의 어울림이 어색하고, 쌀 포의 갈고리도 위로 올라간 느낌이 든다.
불구하고 마음속에서 미리 구상하지도 못한 상태로 이 정도의 역작을 즉석에서 휘호한 것을 보면 역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명필임에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지금 서원에 걸려 있는 현판은 모사본이고 국학진흥원에 원본이 소장되어 있다.
글씨나 그림만 그렇겠는가?
세상일이 다 그렇다.
새로운 한 해를 맞아 순백의 화선지가 우리 앞에 펼쳐졌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의욕을 앞세운 덤벙대는 붓질보다 차분히 생각을 가다듬는 일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