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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 죄

 - 병원 스토리 1 화

 우리 병원에는 방사선 사고와 관련한 방사선 진료 센터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사태가 일어나면 여기서 발생하는 환자들은 우리 병원으로 이송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방사선 누출 사고가 의심될 때도 이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문의 해결을 우리 병원에서 담당하기 때문에 지난번 라돈 침대 사건 때에도 우리 병원에 이에 대한 문의가 쇄도하여 병원 전화 시스템이 마비될 지경에 이른 적도 있었다고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방사선 치료기인 코발트 치료기가 도입되면서 방사선 치료를 필요로 하는 암 환자들이 많이 내원하였다. 병원 초기에는 당시 자궁암이 많았던 시기라 자궁암 환자들이 많이 내원하였고 자궁암을 방사선으로 치료하는 방사선 종양학에서 외부 방사선 치료뿐 아니라 자궁 강 내 방사선 치료 (intracavitory radiation) 치료도 많이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궁 강 내 방사선 치료는 병실 각 층의 가장 끝에 방사선 차단벽이 있는 특수한 설계가 되어 있는 방에 환자가 입원하여 1-2일간 방사선 동위원소를 자궁경부에 삽입된 채로 누워 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사선 종양학 기사분이 입원실에 있는 그 특수 치료실을 다니면서 방사선 동위 원소를 특수 운반 장치 안에 넣어 운반하고 관리했었다. 이러한 우리 병원의 동위원소가 저녁 9시 뉴스에 출연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사랑싸움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내가 이 병원에서 과장으로 발령이 나기 전으로 전임의(fellow)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의국 문을 누군가가 노크하였다. 그리고는 내과 4년 차 전공의 선생님이 우리 의국 문을 열고 들어왔다.


" 저.. 선생님. 혹시 할로탄(과거 사용된 흡입마취제의 일종)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제가 좀 필요해서요. “


" 요즘은 할로탄은 쓰지 않아요. 엔 플루란(과거 사용된 흡입마취제의 일종, 현재는 사용 안 됨)이라고 그 약제를 쓰지요. 어디에 쓰려고 그러세요? “


그 선생님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 제가 동물 실험에 좀 사용해 볼까 해서요. 동물 얼굴에 마취 가스 묻은 거즈를 데면 마취시킬 수 있을까요? “

라고 묻는 것이었다.


어떤 동물이 거즈를 묻혀 얼굴에 갖다가 데는데 정신을 잃을 때까지 저항 없이 얌전히 마취 가스를 흡입하고 있겠는가? 더구나 흡입마취제는 금방 휘발되어 사라져 버린다.


" 그런 방법으로는 흡입마취제로 마취시키기 어려워요. 마스크로 씌워서 고 농고로 처음부터 흡입시켜야 가능해요. 마취기를 통해서요. “


라고 내가 대꾸하자 그 선생님은 곤욕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인사도 없이 우리 의국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별 이상한 선생도 다 있다고 생각하고는 깊은 생각 없이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일이 일어난 뒤 약 한 달쯤 지난 어느 날 저녁, 9시 뉴스를 시청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우리 병원 전경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반가운 마음에 열심히 시청하고 있었는데 웬걸... 우리 병원에 대한 좋은 기사가 아니었다.


 병원이 나오고 어떤 자가용 내부가 보이더니 내부에 어떤 포에 씌워져 있는 물체를 보여주고... 알고 보니 우리 병원의 모 직원이 복수심에 다른 사람의 자가용에 방사선 동위원소를 넣어 놨다는 사건 보도였다. 뉴스에서는 항상 모 씨로 나오니 누군지 그 뉴스를 볼 땐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 세상에 왜 이리 모 씨가 많으냐고 물어봤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출근하여 들은 사건의 진상은 이러했다. 내과 전공의 중 결혼까지 한 전공의가 병동 간호사와 내연의 관계가 되었는데 이 간호사가 변심하자 앙심을 품었단다. 그래서 간호사의 자가용에 우리 병원 방사선 동위 원소를 훔쳐 그 안에 넣고 헝겊으로 덮어 놨다고 한다. 간호사는 자신의 차에 이상한 물건이 있는 것을 보고 경찰에 신고하고 결국 그 사건의 내막이 드러난 것이었다. 


 난 참으로 별일도 다 있네 하고 생각하고 병원에서도 동위원소를 잃어버린 꼴이 되었으니 곤란한 상황에 처했겠다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나중에 그 내과 전공의가 누군지 알게 되고는 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 달 전 우리 의국에서 마취제를 물어보던 그 전공의였다.


 내 생각에는 그 전공의가 처음에 계획했던 방법이 동위원소로 복수하는 방법이 아닌 마취제를 이용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내가 그 전공의에게 별생각 없이 실험에 사용하라고 마취 약제를 건넸더라면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 아마 나도 9시 뉴스에 나오지 않았을까? 아니면 약물 관리 위반으로 경찰서 신세를 졌으려나 알 수가 없지만 다행히도 나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 또한 '오 마이 갓'이었다.


 나중에 들은 후문으로 그 내과 선생님은 아버님도 유명한 대학 병원 학장이시고 좋은 집안의 자제분인데 본인의 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어릴 때 어머니를 잃고 심적으로 외로운 상태였단다. 그런 와중에 자신보다 나이 많은 그 간호사가 평소에 자신에게 따뜻한 어머니와 같은 태도를 보이자 서로 호감을 갖다가 결국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단다. 그런데 그 간호사도 아이가 있는 유부녀였으니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사랑보다는 가족을 선택했는데...


 이 선생님은 사랑을 잊지 못했고 그 사랑이 미움으로, 복수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 선생님은 결국 구속되었고 그 간호사님은 병원을 그만두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선생님께서 출소한 후 그 간호사님과 다시 결합하였다는 후문이 들려왔으나 근거 있는 이야기인지는 모른다.    


 가끔 젊은 암 환자분들이 여자 친구나 남자 친구가 있고 결혼까지 약속한 상태에서 암으로 진단받는 경우가 있다. 케이스가 다 다르나 대부분은 헤어지는 것 같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러나 드물게는 수술이나 항암 치료를 받고 안정된 상태까지 기다렸다가 결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는 환자의 상태가 매우 안 좋을 때, 즉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결혼을 진행하는 커플도 있었다.


 물론 나는 서비스 파트 의사이니 직접 환자의 사연을 접하는 것이 아닌 외과 파트의 전공의나 전문의들이 들려주는 안타까운 사연이나 아름다운 사연 들을 듣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정확한 사연들은 잘 모른다. 그러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접하면 그야말로 기분이 좋다. 메마른 사막이나 모랫길 위를 걷다가 물줄기를 만나는 기분이랄까?    


 인생이란 험난하고 외로운 길에 서로 아끼고 의지하고 사랑할 수 있는 그 누군가를 만나 평생을 같이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로망이라고 하겠다. 나 또한 20년 넘게 내가 만난 동반자와 사랑하면서 살아가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때로는 쉽지 않은데 결혼 생활이란 사랑만으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은 확실하다. 또한, 사랑 없이도 결혼 생활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서로 사랑해서 만났다가도 말년에는 서로 원수 같은 존재라고 욕하면서도 헤어지지 못하고 사는 것이 한국에 사는 대다수 부부의 모습이다. 나도 나의 반려자와 젊은 시절 많이 싸우고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야 라고 되새기며 오늘도 그의 속옷을 갠다.                  



   

제목: Blindman's bluff (까막잡기 놀이,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작품, 1769-70, 툴레도 미술관)    


 18세기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 사랑놀이로 실제로 유행했던 까막잡기 놀이를 그린 작품으로 로맨틱한 배경과 걱정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묘사로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의 예술형태이다. '눈먼 사랑, Love is blind'라는 고전적 경구의 제시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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