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3 - 함부르거반호프 현대미술관, es denkt
독일의, 독일에서 전시되는 현대 예술의 수준은 상당하다. 카셀에서 열리는 '도쿠멘타 DOKUMENTA'는 늘 센세이션이었으며, 칼스루에는 물론 뮌헨의 '피나코테크 Pinakotheken'들에서도 막강한 전시품목에 적지 않게 놀랐다. 우연히 프랑크푸르트에서 본 '제프 쿤스'의 전시는 또 어떤가.... 여기 베를린에서는 '함부르거 반호프 Hamburger Bahnhof'를 찾았다. 베를린의 상징과도 같은 '박물관 섬'에서 전시되는 것은 독일이라는 한 국가의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기에 나의 관심과 호기심은 이곳에서 더 적절하게 제 짝을 만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Hamburger Bahnhof – Museum für Gegenwart – Berlin', 이곳은 독일 중앙역이 생기기 전 함부르크와 베를린을 오가던 화물역이었다. 중앙역이 개통되고 이곳은 '베를린 현대미술관'으로 용도 변경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그래서 그런지 기차역처럼 뻥 뚫린, 넓은 공간, 높은 층고가 현대 예술작품을 전시하기 최적이 아닐 수 없다. 자고로 기차역은 높고 그 높이를 충분히 감싸 안을 정도록 투명한 천정으로 마감해야 한다. 저 높이 하늘도 보이고 구름도 보이고, 빗방울이 내리칠 때는 그 소리마저 고즈넉하게 들릴 정도로!! 저 멀리서 서서히 달려와 기차 밖에 나오자마자 접하는 공간, 그 공간이 낯선 여행객의 숨통을 틔어주고 반겨주는 그런 넉넉한 곳이어야 지친 일상 여행자들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여기 이 넓은 공간, 높고 탁 트인 시야, 기차역 건물 저 속으로 끝도 없이 깊게 뻗은 전시 공간 등.. 동시에 3개 이상의 전시를 진행할 수 있는 그런 광활한 곳이 바로 이 '함부르거 반호프 - 베를린 현대 미술관'이다.
지금은 다른 여러 전시와 더불어 칼 앙드레 Carl Andre의 'Sculpture as Place, 1958-2010'를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는 '조각'을 전시하고 있으나 '조각'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재검토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생각의 포문을 여는 그런 종류의 전시다. 생각해야 하는 전시, 과거의 경험과 현재의 인식이 만나 여러 가지 중첩된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그런 전시를 난 선호한다.
우리가 흔히 평면으로 인식하는 보도블록이나 저렇게 바닥에 깔린 1센티나 될까 싶은 두께의 금속조각을 '칼 앙드레'는 조각이라고 주장한다. 미세한 돌출, 약간의 부피감에서 3차원의 느낌을 받긴 하지만, 조각이라는 일상적인 개념과는 어딘지 모르게 일치하지 않는 이 전시를 보며 문득 '루치오 폰타나 Lucio Fontana'를 떠올렸다. 그가 폰타나의 공간주의를 응용하지 않았을까? 1949년도에 루치오 폰타나는 평면인 캔버스를 칼로 그어 선을 만들었고 이 선은 2차원적인 평면에 공간성을 부여했다. 폰타나를 처음 접한 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이곳에 걸린 폰타나의 작품은 적지 않은 충격이었고, 이 이름은 오랫동안 내 기억에 머물러 있었다. 앙드레의 전시가 어떤 시냅스를 건드렸는지 지금 다시 이 이름이 생각난다. 루치오 폰타나가 평면을 벌려 공간을 만들었다면, 칼 앙드레는 한 걸음 더 나아가 평면적인 것들의 입체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우리가 평면이라고 인식하는 것들이 사실은 3차원적인, 공간의 성격을 지니는 오브제일 수 있다는 발상!...
현대 예술이 던지는 이런 신선한 도전을 사랑한다. 자극이 되고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게 하는 그런 작은 점화력을!
2.
특히 공간 속에 조각 작품이 어떻게 배열되느냐에 따라 입체성의 정도가 달라지는 것에도 주목한다면, 바로 밑에서 보게 되는 조각들의 고른 배열, 같은 높낮이는 미묘하게도 평면적인 인상을 준다. 조각인데 정적이다. 바로 이 점에서 또다시 뭔가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하고 기억을 더듬어보니 시멘트 블록을 베를린 한가운데에 떡하니 쌓아놓은 곳이 있다. '유대인 학살 추모공원 Holocaust Mahnmal'! 어제 이 공원을 다녀왔는데, 비바람에도 한 시간을 대기하였다가 지하의 전시실까지 둘러보고 난 후 어떻게 이 공원을 생각해야 하는가... 에 대해 잠시 고민했었다. 이 공원은 높낮이와 부피, 크기를 달리 한 서로 다른 직사각형 형태의 시멘트 블록을 구불구불한 지형 위에 배치함으로써 최대한 동적인 인상을 주게끔 설치되었다. 공원 건축가는 바로 이런 역동성을 의도했던 걸까? 전무후무한 조직적인 유대인과 대학살이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기억해야 할, 살아있는 역사라는 인식을 만들 수 있도록 살아 꿈틀거리는 돌덩어리를 기획했던 것은 아닐까.....
3.
Peter Eisenmann................ Le Corbusier
'유럽에서 학살된 유대인을 위한 기념비 Denkmal für die ermordeten Juden Europas in Berlin' 가 이 추모공원의 정식 명칭이다. 집 앞의 공동묘지도 공원처럼 가꾸는 유럽 문화에서 추모해야 할 것을 공원형태에 모아놓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내가 1년 동안 살았던 뮌헨 집 앞도 공동묘지였고, 1달간 살았던 노이쾰른의 친구 집도 늘 아침에 운동할 수 있던 공동묘지였다. 공원문화!! 이 추모공원은 뉴욕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피터 아이젠만 Peter Eisenmann'이 2005년도에 만든 것이다. 또다시 과거를 박제화하느냐...라는 논란을 불러있으킨 추모공원 프로젝트였지만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스타일을 지향한 아이젠만은 이 직사각형 블록으로 멋지게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아이젠만이 1932년생, 칼 앙드레가 1935년생, 둘 다 뉴욕을 거점으로 한 예술가이니 미니멀리즘에 대한 선호가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둘이 서로 만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예술적 교감을 나눈 적이 있었는지도 나는 알 수 없다. 사실 알고 보면 둘의 예술적 지향점이 완전히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날 다른 곳에서 본 두 예술가의 작품을 이렇게 머리 속으로 비교해보니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좋아하는 예술의 방향을 어림잡을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베를린에서 1년 정도 활동했던 '바우하우스'를 기념하여 '바우하우스' 박물관을 세운 베를린이 아닌가!
아이젠만의 작품과 그가 모범으로 삼은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물, 베를린에는 '코르뷔지에 하우스'가 있는데 추모공원과 비교해보면 유사점이 한 눈에도 금방 드러난다. 내게는 아이젠만이 좀 더 위트가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4.
다시 베를린 현대 예술!
칼 앙드레의 완벽한 평면 위의 타일과 달리 위 홀로코스트 기념공원 지면은 굴곡져 있다. 마치 똑바른 일렬종대의 블록인 것 같지만 높낮이와 굵기가 다 달라 상당히 생기가 돈다. 실제로 미로 같기도 해서 이 공원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들어서기만 하면 숨고 찾고, 뛰며 술래잡기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어린이들이 뛰어노는 곳은 전쟁의 포탄이 난무해도 아름답고 처연하다. 음울한 회색빛 콘크리트 나무숲, 뿌리도 없고 잎도 없고 열매도 맺지 않겠지만 이 공원에 아이들이 뛰어 논다면야 그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죄 많은 역사에 대한 반성을 꼭 음울하고 우울하게 풀어낼 필요만은 없지 않은가! 멋지다 베를린!
Tipp: 칼 앙드레의 전시 외에도, 터키 예술과 요셉 보이스를 비롯하여 특별전시인 율리안 로제 펠트의 전시까지 이 '현대 박물관'은 현대 예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곳이다. 중앙역에서 멀지도 않은 곳이니 ~~
글 사진 모두 Arhel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