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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Sep 05. 2016

독일의 경주

트리어 1. -  예술로 치른 전쟁터가 있다면 여기!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0.

9개의 유산


트리어에는 유달리 어린 단체여행객들이 많다.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이다. 이곳은 독일의 경주! 꼬맹이들의 손에는 1 유로짜리 아이스크림이 들려있고 도시가이드는 아이스크림에 뺏긴 관심을 돌리려 진땀을 뺀다.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트리어 Trier! 기원전 3세기에 로마인들이 세운 이 오래된 도시를 걷다 보면 그 시간만큼이나 겹겹이 중첩된 예술 양식들, 주교와 시민들이 힘겨루기 한 흔적들, 쌓고 고 또 쌓건물들 그리고 하늘에서 뚝 떨어진 돌조각에 얽힌 전설들이 줄줄이 엮어져 나온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것들만 9개, 이 유산 하나하나에 몇 천년의 이야기가 서려있으니 그야말로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조너선 사프란 포어~




1.

'하얀 문 Porta Alba', '중간문 Porta Media', '유명한 문 Porta Inclyta'...

그러나 남은 것은 '검은 문 Porta Nigra'뿐


도시쪽에서 본 모습


트리어에는 6.4킬로나 되는 도시 성벽이 있었다. 이 성벽의 북쪽 문이 바로 이 '포르타 니그라'. 조선시대의 4대 문처럼 이곳에도 4대 문이 있었으나 남은 것은 검게 변하는 코르 델 사암으로 만든 이 성문 하나뿐이다. 사실 이 성문은 처음부터 완성된 적이 한 번도 없이 기본 토대만 올린 후 증축되었다 헐렸다가를 반복했다. 디자이너의 눈썰미인가.... 한 치에 틀어지는 한복을 다루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돌덩어리를 매만지며 한 바퀴를 돌던 중 돌을 쪼은 정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알파벳 이름 같은 것이 시선을 끈다. 마치 만리장성에 벽돌을 납품한 여러 업체명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처럼, 이곳에도 이 돌덩어리를 쪼개어 직사각형으로 만든 생산자의 이름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던 것이다. MAC! 반갑다 역사 속 그대!


이 돌을 납품한 생산자 이름이 아직도 선명하다. MAC


수천 년 동안 돌이라서 남아있을 뿐, 사실 이 돌조차도 값나가는 것이었다면 다 뜯겨나갔을 것이다. 이 돌들을 지탱하고 있던 '납땜'이나 '철로 된 겸자' 등은 이미 다 뜯겨 나가고 없다. 배고픈 민심은 돌도 뜯어먹을 기세였을 테니... 저 산화된 흔적이 있던 부위가 철심을 박아 돌과 돌을 클립처럼 연결했던 흔적이다. '자세히 보아야.... 너도 그렇다!'


철로 된 겸자가 있었던 부분! 알고 찾으니 보이는 디테일들


모조리 헐어 버려라!


11세기에는 시칠리아 태생의 비잔틴 수도사 한 명이 이 포르타 니그라에 건물을 짓고 살았었다. 그가 죽은 후 교황은 그를 성인으로 추대하여 성문 지하에 매장하고 그 뒤로 교회를 지으라고 명했다. 중세에 포르타 니그라는 그냥 성문이 아니라 성문 뒤에 교회가 붙은 건물이었던 것이다. 이 그림에서처럼! 그러나 1802년 이곳을 방문했던 나폴레옹은 증축된 건물을 모조리 허물어 로마시대의 성문만 남기게 했다. 지금 트리어에서 우리를 맞는 것은 나폴레옹 덕분에 로마 성문원형 형태로 복원된 것, 이 문은 198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중세 수도원 모습의 포르나 니그라 Von St._Simeon_Trier_Caspar_Merian_1670_gross.jpg: Caspar Mer


2.

도둑으로부터 내 집을 지키는 기발한 방법


중세 약탈을 일삼는 도둑떼로부터 내 집을 지키기 위해 절묘한 수단을 사용했던 건물이 포르타 니그라로부터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아직 남아있다. 바로 이 13세기 건물, 바로 "드라이쾨니겐하우스 Dreikoenigenhaus", 이 집에 '에피파니 Epiphanie'라는 그림이 걸려있었는데, 거기 그려진 동방박사 세 사람의 위엄을 빌려온 것이다. 이 역사적 유산의 전체 촬영을 방해하는 1층의 카페를 무시하고 위를 쳐다보면 2층 오른쪽에 세 개의 창문 옆으로 현관문이 보인다.


드라이쾨니겐하우스 전경, 저 커피집 이사 갔음....


원래 이렇게 2층에 현관문이 있었고, 사다리를 통해서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아찔하게 집으로 가는 길이 었겠다. ~~ 1층의 현관은 후대에 와서 만들어진 것이다. 원형에 가깝게 유지하고 될 수 있으면 역사적 발자취를 보여주려는 트리어의 문화재 복원 방향이 돋보이지 않을 수없다.


드리이쾨니겐하우스의 원래 현관, 사다리없인 못들어가니 지문인식현관보다 더 안전 ?


물론 기둥을 세우고 둥근 활모양의 아치를 세우던 로마양식에서 초기고딕양식으로 넘어가는 지점에 세운 이 집의 건축양식은 어정쩡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예술로 치른 주교와 시민의 전쟁~~


포르타 니그라를 뒤로 두고 광장 쪽으로 걷다 보면 예쁜 집들로 둘러 싸인 이 중앙광장에 도착한다. 정면에 보이는 저 교회! 14세기부터 시민들은 점차 힘을 축적하고 시장을 선출하며 주교의 권력에 대항하기 시작한다. 당시 시민들의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저기 눈에 확 띄는 '성 강골프 마르크트 교회'의 높은 첨탑이다. 건설 당시만 해도 그리 높지 않던 교회 첨탑이 16세기 초 부유한 시장 부인의 기부금으로 62미터로 증축되어 당시 가톨릭의 힘과 권력을 상징하던 대성당보다 더 높게 선다. 도시의 지배권을 쟁취하기 위한 시민과 주교 간의 상징적인 싸움의 서막이 오른다!!.... 두둥~~


중앙 광장


역사를 모르면 그냥 예쁜 곳, 역사를 알고 보면 기가 막힌 곳, 그래서 수학여행 오기 딱 좋은 곳!


중앙광장과 그 주변, 아름답고 진귀한~~ 역사가 살아 말을 건넨다.
성 강골프 마르크트 교회, 다닥다닥 건물 뒷편에~~ 첨탑만 높이 솟아!! 그 높이가 가장 중요!!


이 밑에 보이는 건물이 바로 시민들이 모였던 '슈타이페 der Steipe'라고 불렸던 건물이다. 이 슈타이페라는 말은 트리어에서 '건물을 지지한다 „Steipen“= Stützen'는 방언에서 유래하며, 1층 벽에서 볼 수 있는 4개의 성상 야곱, 헬레나, 베드로, 바울이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물론 1층에서 시원하게 뢰벤브로이를 마셔도 좋겠지만 이상하게 그것보다 내 눈길을 끄는 것은 저 정말 무장한 중세 기사 두 명이다.


슈타이페 der Steipe


정말 무장한 기사 두 명! 이 병정들이 지켜보고 있는 방향이 바로 대성당이다. 건물에 무기를 든 군인을 세우다니..... 좀 더 자세히 줌인!!


아니..... 심지어 긴 칼을 차고 한쪽 다리를 건방지게 뻗고 있는 오른쪽 병정은 몸의 은밀한 부분을 노출하여 대범하다 못해 대놓고 노골적으로 대성당을 조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주교는 이런 상징적인 조롱을 매일 쳐다보며 끓는 가슴을 식혀야 했을 것이다.


야한 기사!



그러나 트리어는 이 조롱에 분기탱천하여 시민을 박해하고 건물을 부수어버리는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주교 측은 1595년 광장에. 그것도 정확히 슈타이페와 성 강골프 마르크트 교회 앞에 예쁜 분수를 설치하게 하는데, '베드로'를 가장 높이 세워줌으로써 시민 측에 화해의 손길을 내민 것이다. 그러나 위트도 잊지 않았다. 이 시장의 분수를 또(!) 자세히 쳐다보면 교양 없고 천방지축으로 이곳저곳에서 출몰하는 원숭이들이 눈에 거슬리는데, 이 원숭이가 누구를 의미했을지는.... 시민들은 알았을 것이다~~


 

아름다운 중앙광장의 분수, 정 가운데 과일 바구니 손잡이를 물고 있는 원숭이 한 마리!


정가 운데 과일 바구니 손잡이를  물고 있는 원숭이!  먹을 것을 탐닉하는 동물, 세속적인 가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검은원숭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가운데 교회의 가치를 상징하는 네 성상의 위엄이 더욱 돋보인다.


이리저러 성인의 옷가지를 타고 뛰어노는 원숭이들


여기서 그친 주교 측이 아니었다. 대성당에 또 한 번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는데......

루치아 할머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서 계속해드릴게요~



글, 그림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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