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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iel Jun 11. 2018

선물은 낡아야 제 맛이었다

선물의 재발견

며칠 전 몽골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몇 가지 챙기려 부모님 집에 들렀다. 지난번 할머니 댁을 내려가는 중에 부모님을 들들 볶아 얻어낸 침낭과 손전등, 경량 패딩 등. 넓은 챙 모자도 있지만 캡 모자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찾아봤는데 낯익은 모자 하나가 보였다. 보스턴 펜웨이파크에서 선물로 사 왔던 모자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야구에는 관심이 크게 없었지만 같이 여행했던 E언니는 온갖 스포츠를 섭렵, 그중에서도 야구를 너무나도 사랑한다. 그 덕분에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 안 대고 보스턴 레드삭스 경기를 볼 수 있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행운이었는지 몰랐었다. 그저 경기장 특유의 열기와 흥분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즐거웠다. 

우리는 레드삭스의 팬도 아니었는데도 경기 직후 엔돌핀이 폭발한 나머지, 당장 귀가 버스나 지하철을 탈 생각은커녕 경기장 근처를 열심히 배회하면서 훌리건들의 미련 가득한 응원가를 따라 불렀다. 끓어오르는 팬심에 우리는 그다음 날에도 펜웨이 파크를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여유롭게 매장을 돌아다니며 선수들의 유니폼과 모자, 액세서리들을 구경했는데 도저히 안 사고는 못 배기겠어서 비교적 저렴하고 디자인도 괜찮았던 모자를 고르기로 했다. 돈 없는 학생 신분에 두어 시간을 고민한 끝에 내 모자와 아빠 모자를 하나씩 골랐다. 귀국하고 나서 화장품, 영양제, 바람막이 등 미국에서 값싸게 구할 수 있던 선물들을 풀어놓았는데, 개중에서 아빠에게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이 모자였다. 그때도 잘 샀다며 뿌듯했던 게 기억이 난다.

사진 상으로는 희미하지만 육안 상 꽤 진하게 자국이 남았다!

그러고 나서 한참 이 모자의 존재를 잊고 살다가 다시 보니 반가웠다. B부분의 빨간 실밥은 살짝 풀리고 쨍한 네이비 부분은 허옇게 물이 빠져있는 게 딱 봐도 많이 써서 낡은 상태였는데 나는 괜히 아빠에게 물었다. '이 모자 잘 안 쓰지?' 아빠는 많이 써서 그렇게 된 거라 답했다. 내가 준 선물이 이토록 잘 쓰였다는 걸 확인받고 싶었고 그게 맞아서 기쁘고 뿌듯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비하고 주는 과정에만 혹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 순간의 반응에만 신경 썼다는 게 부끄럽기도 했다. 유치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10년째 서로의 생일을 챙기는 친구들에게 물을 것이다. 그거 아직도 잘 쓰니? 그리고 나 또한 작년에 생일선물로 받은 찻잔의 침착된 부분을 찍어 보낼까 한다. 선물 받을 땐 티 없이 깨끗하고 빛나던 찻잔이 하루에 한 번씩 홍차를 마시는 바람에 찻물이 침착되어서 좀 지저분하게 느껴졌는데 어쩌면 이거야말로 좋은 선물이라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선물을 준 이에게도, 받은 이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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