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마지막 기회
Prologue
오늘로 일곱 번째 되는 날이다. 찬 바람이 물러나고 앙상했던 나뭇가지는 어느새 푸르고 노란 색동옷을 자랑하며 따스한 바람에 나부낀다. 아내와 난 이런 계절과는 달리 시리고 찬 냉가슴을 여전히 유지한 채 서로 마주 보고 있다. 6층짜리 하얀색 건물 앞. 30분째 그 앞을 이리저리 오가며 쉽사리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우리 부부는 이제 익숙해 질만 하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더 서성이다 내가 먼저 용기를 냈다. 아내의 손목을 잡아끌고는 커다란 유리문을 밀며 들어갔다. 이른 시간에 방문했는데도 빈자리는 거의 없었고 일찌감치 자기 차례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곧장 프런트로 가 접수를 마치고 세월이 느껴지는 긴 소파 형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 전광판에 아내 이름과 접수 완료가 된 것을 확인한 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표정으로 기다렸다.
매번 올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곳을 방문한다. 아니 자주 방문해도 좋으니 결과만 긍정적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맞겠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 마지막으로 방문했다. 아쉽기도 하고 후련하기도 한 기분에 묘한 웃음마저 새어 나왔다. 항상 이렇게 소파에 앉아 있다 보면 주변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생각만 많아지고 희망적인 마음보다 오히려 불안한 마음만 더 커져갔다. 그래도 그럴 때마다 작게나마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었다.
같은 마음으로 우린 서로 얼굴을 보며 ‘이번엔 잘 될 거야.’라고 위로를 건네곤 했다. 하지만 매번 같은 결과에 풀 죽어 실망하고 돌아설 때면 가슴 한편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쓰라렸고 위로는 곧 희망 고문으로 다시 돌아왔다. 남편이자 남자인 나는 쓰린 마음을 어떻게든 참아 낼 수 있다고 하지만 아내는 그럴 때마다 몇 주간 깊은 우울 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제대로 된 식사도 한 끼 못 한 채 밤새 침대가 흠뻑 젖도록 숨죽여 울곤 했다. 새어 나오는 소리를 끅끅 삼켜가며 우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렇게 2년이 넘어 햇수로 3년이 다 되어간다. 점차 시간이 흐르다 보니 기대와 실망을 반복하는 쳇바퀴 같은 상황이 점점 싫어졌다. 아니 그보다 아내에게 정신적, 신체적으로 고행에 가까운 이 힘겨운 싸움을 때마다 더 하도록 놔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충분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결심했고 이만큼 했으면 됐다는 생각에 어젯밤 이곳에 오기 전 통보하듯 아내에게 말을 던졌다.
“나영아.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만하자.”
“…”
아내는 말없이 별로 놀라지도 않은 채, 마치 내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다렸는지 아무런 대답도 표정도 없었다.
“쉽게 생각하고 결정해서 하는 말 아니야. 오랜 시간 깊이 생각해 보고 말하는 거야. 그래 너 만큼은 아니겠지만 솔직히 오빠도 지치기도 했고 너 역시도 힘들어 보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여기까지 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 열심히 노력했잖아. 원래 운명을 잘 믿지는 않지만 어쩌면 이게 우리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들어.”
“……”
“우리 둘이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나쁜 방법은 아니야. 요즘은 결혼하고 아이 없이 사는 게 흉도 아니잖아. 생각보다 많이들 이렇게 살아. 처음부터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고 우리처럼 아이를 갖기 위해 여러 번 시도해 보지만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아 둘이서도 만족할 만할 삶을 소소하게 꾸려가는 부부들도 많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침묵하던 아내는 마른 입술을 떼었다.
“그래…. 오빠가 쉽게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 왜 그만하자고 하는지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나 역시 포기하고 싶다가도 나도 내 아이를 갖고 싶다는 생각에 포기가 쉽지 않아…. 한 번 한 번 시도할 때마다 몸도 마음도 힘들지만, 여자로서 신체나이도 점점 한계가 오는 것에 조급하기도 해. 그리고 무엇보다 그냥 지금 이대로 끝내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요즘 그 생각에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단 말이야...”
내가 너무 몰아세웠는지 이도 저도 하지 못 해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안쓰러워 가까이 다가갔다.
“후회…. 그래 맞아. 오빠도 후회라는 걸 하고 싶지 않아서 매번 가슴에 희망 품고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이번에는 되겠지.’, ‘오늘은 왠지 기분 좋은 게 꼭 될 것 같아.’, ‘다음엔 될지도 모르잖아?’ 담을 넘어온 열매를 따거나 귀여운 동물들이 나오는 꿈만 꾸어도 ‘오늘은!’, ‘기필코 오늘은!’ 하고 스스로 응원도 많이 했어.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마치 복권이나 제비 뽑기 하는 기분마저 들 때도 많았고, 고지가 바로 코 앞인 것 같아 이번엔 될 것 같은 기대가 항상 차 있었다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또 기대하는 도박 같은 느낌… 그러니까 나영아. 이번 결과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하자. 잘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이젠 운명이라 생각하고 그만하자. 그래도 돼. 우리 충분히 노력했어. 그리고 우리 둘만의 앞날을 계획하는 게 우리에게 더 희망적이고 좋을지도 몰라.”
그렇게 눈물에 젖은 뺨으로 마지못해 끄덕이던 아내 모습에 가슴은 미어졌지만 결단은 해야 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없이 흐르는 시간과 아내 건강까지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마지막 결과를 확인하는 날이 바로 오늘이다. 오늘 결과에 따라 우리 앞날의 모든 향방이 가려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