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사태 발생!
코드 B 발동!!
“오빠…”
“…”
“오빠!”
“으응… 왜…”
“나 배가 조금 아파”
“아 음… 화장실 다녀오면 되지…”
“아니 화장실 배가 아니라 진통 같아서 그래”
“음… 또 그 가 진통 같은… 그런 거 아닐까…”
잠결에 귀찮은 듯 무심히 말을 던졌다. 평소 조금만 아파도 진통인 것 같다며 겁을 잔뜩 집어먹고 호들갑인 적이 많았다. 그러고는 화장실만 다녀오면 그렇게 아프다던 배가 아무렇지 않았던 날이 잦았기 때문에 그날도 무거운 눈꺼풀을 뜨지도 못한 채 화장실로 떠밀다시피 보내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오빠! 오빠! 나 터진 거 같아!”
“그래… 응… 터져… 뭐…, 뭐라고?”
무언가 터졌다는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양수 말이야. 지금 터진 것 같아. 어떡해! 이번엔 진짜 같아!”
“아! 그… 그래. 알았어! 코드… 코드 B!”
한쪽 눈만 겨우 뜬 채 제일 먼저 베개 밑을 휘저어 휴대전화부터 찾았다. ‘몇 시지?’ 오전 5시 45분. 반 텀블링하듯 부리나케 일어나 씻을 틈도 없이 주섬주섬 옷만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급한 마음에 발가락에 옷이 걸려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거울에 얼굴을 들이밀 새도 없었다. 아내는 무릎이 하얗게 해진 잠옷 바지에 기모 재질 후드 티셔츠와 두꺼운 파카 점퍼를 겹쳐 걸치고 방문에 걸려있던 작은 가방을 크로스로 둘러맸다. 그리고 난 몇 번 연습한 것처럼 거실 중문 옆 여행용 가방 손잡이를 힘껏 잡아 뺐다. 이럴 때를 대비해 아내가 미리 챙겨 두었던 ‘출산 전용 완전무장 바퀴 달린 가방’이다. 뭐가 들었는지 남자가 들기에도 제법 크고 무거웠지만, 가뿐히 번쩍 들어 운동화를 구겨 신은 채 현관문을 열었다. 새벽이라 아직 어두웠지만, 센서 등 덕분에 환해졌다. 재빨리 엘리베이터를 호출하고 기다렸다. 그사이 무거운 몸에 뒤뚱거리며 걸어오는 아내 손을 잡고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몸을 옮겼다. 문이 닫히자 맨 아래 버튼을 눌렀다.
아내와 난 이런 상황을 대비해 각자 준비할 것들과 누가 어디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미리 정해놓은 적이 있었다. 오늘같이 급한 상황이 닥치면 서로 어리둥절하다가 위급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시뮬레이션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고 그 덕에 서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이른 시간 안에 준비할 수 있었다. 사실 나 혼자 정한 거지만 재미로 이런 상황을 ‘코드 B(Baby)’라 명명했다. 아내는 웃으며 시뮬레이션에 코드명까지 정하는 남편이 애들 같아 보였는지 철없다며 한심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3면이 거울로 된 엘리베이터 안, 아내의 표정이 반사되어 보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에 서로 멋쩍게 씩- 웃었다. 아이가 곧 나올 것같이 긴박한 응급 상황은 아니라는 생각에 약간의 심적 여유가 있었다. 아파트 9층에서 내려가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 순간이 오기까지 상상으로만 그리던 것이 현실이 된다는 것에 그간 지나온 여러 장면 장면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1층에 다다르는 동안 아내는 별말 없었지만 아마도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자연스레 깍지 낀 아내 손을 내 점퍼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두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찬 기운이 가득한 새벽, 다른 날 같으면 벌써 동이 터 해가 뜰 시간이었지만 아직 밤이 더 긴 계절이라 그런지 하늘은 새까맣게 깜깜했다. 새 찬 아침 바람에 두 볼이 깎여 나가듯이 스쳐 지나고 입으로는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큰길로 향했다. 5분 남짓 기다림에 멀리 보이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새벽이라 바로 잡히지 않아 오래 기다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막 유턴하는 택시를 붙잡아 올라탔다.
“돈암경찰서 사거리 산부인과로 가주세요.”
이 말을 하고 나니 갑자기 저 밑에서 올라오는 현실감에 뭔가 큰일을 하러 나서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아이를 진짜 만나러 간다는 기분 때문이었을까.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들뜨고 설레기도 했다. 지금 가슴에 느껴지는 감정이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달리는 택시 창문 밖으로 서서히 어둠이 물러나면서 밝아 오는 아침과 교대를 하고 있었다. 깜깜해서 더욱 밝아 보였던 손톱 모양 달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내와 난 이동하는 내내 서로 아무 말 없이 창문 밖에 스쳐 가는 가로등 불빛만 바라보았다. 특별히 어떤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추운 날씨에도 맞잡은 손에 맺힌 땀은 서로의 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간 2년이 넘도록 검진을 위해 줄기차게 오가던 산부인과인데도 왠지 오늘은 느낌이 조금 달랐다. 입구에 도착했을 땐 길게 숨을 내뿜어 입김을 크게 만들었다. 여느 때 같으면 먼저 2층 안내 창구로 올라가 접수하고 앉아 기다렸겠지만, 오늘은 3층 ‘분만 대기실’로 바로 향했다. 진통이 오거나 양수가 터지면 언제든 바로 3층 ‘분만 대기실’로 가라는 의사의 말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이라 당직 중인 간호사를 만나 이곳에 오기 전 양수가 터지기까지 상황을 간략히 설명하고 난 후 검사를 위해 아내를 먼저 들여보냈다. 한숨 돌리고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준비부터 도착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유치하지만 ‘코드 B’라는 걸 만들어 두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긴장감이 살짝 풀려서일까? 다리가 후들거려 바닥에 주저앉기 일보 직전이었다. 앞서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던 남자는 간호사의 부름에 따라 들어간 후로 이곳에는 나 말곤 아무도 없다. 문 옆에 놓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만, 막상 닥치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문득 군 시절 새벽 훈련으로 사이렌 소리에 놀라 불시에 연병장으로 집합하던 때가 생각났다. 정신 차릴 새 없이 작업모를 눌러쓰고 바지 끝단을 양말에 밀어 넣고는 재빨리 튀어나와야 했다. 집합이 완료되면 앞 줄부터 앉으며 번호를 외친다. 그렇게 인원 확인을 하고 당직 사관의 지루한 훈시가 끝나면 다시 내무반으로 복귀한다. 밤새 탈영이나 내무반 이탈자는 없는지 확인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군기 잡기 위한 목적으로 불시에 사이렌을 울려 대며 괴롭힌다. 그나마도 인원 확인 후 바로 들여보내면 다행이지만 목소리가 작아 시원치 않거나 굼뜬 행동으로 대열에 빨리 합류하지 못하면 달밤에 체조나 비 오는 날 신나게 굴리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분명 인격적으로 심각히 문제가 있어 보였지만 그땐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당시 내무반으로 복귀하며 바라본 밤하늘의 노란 빛깔의 달은 지금도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열 달 가까이 되었을 때쯤 커다란 아내 배에 대고 ‘인제 그만 나와라. 아빠가 너무 보고 싶다. 꼭 만나자. 사랑해’라고 종종 말하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배가 꿀렁 이면서 꼭 물음에 답하는 것 같았다. 흑백 초음파 사진으로만 보았던 우리 아이. 얼굴은 어떻게 생겼을까? 날 닮았을까? 예쁜 엄마 많이 닮아야 하는데… 이제 곧 만날 생각에 처음 느껴보는 이 기분 좋은 떨림에 다시 두근거렸다.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아이 울음소리는 어떨지, 피부 감촉이며 눈동자까지 무척 궁금했고, 드디어 만져보고 안아볼 수 있다는 기쁨에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잠깐이었지만 걱정보다 아이를 떠올리며 곧 우리 부부에게 다가올 다양한 상황과 달라질 삶에 행복한 미소를 입 안 가득 머금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들어간 아내 소식이 궁금했고, 걱정되었다. 행복한 마음과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가슴을 끌어안고 그대로 소파에 앉아 엎드려 다리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