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 좋은 인간의 행복법

행복의 빈도를 채우는 기술

by 이지은

혼자 살기 시작하고 처음 마신 술은 복숭아맛 이슬톡톡이었다.

술이라기엔 너무 달고, 탄산음료라기엔 알싸했다.

평소 술을 즐기지 않던 내가 굳이 그 캔을 들었던 건, 어쩌면 무언가 새로워지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월급날, 퇴근 후, 아무도 없는 방.

조용히 뚜껑을 따고 한 모금 마셨을 때, 그 맛은 의외로 괜찮았다.

삶의 무게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 하루는 조금 덜 무거웠다.


한 캔만 마셔도 금세 얼굴이 달아오르는 나는 스스로를 ‘가성비 좋은 인간’이라 부른다.

크게 흔들리기보다는, 작고 자주 반응하는 사람.

시원한 맥주 한 모금, 이어폰 속 음악 한 곡, 길에서 마주친 고양이 한 마리.

그런 것들에 쉽게 웃고, 쉽게 위로받는다.

쉽게 기뻐지는 건 나약함이 아니라 생존법이다.


왜 나는 작은 걸로 위로받는 인간이 되었을까?

혹시 그건 큰 것을 바랐다가 좌절했던 경험 때문은 아닐까?

커다란 위로는 항상 늦고 무겁기 때문에, 가벼운 것을 먼저 선택하는 법을 배운 걸지도.


여름밤엔 야외 테이블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맥주를 마시는 상상을 자주 한다.

딱히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좋은 사람과 옆자리에 앉아,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느긋해진다.

누군가는 그걸 별거 아니라고 부를지 몰라도, 나에겐 충분히 의미 있는 순간이다.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했다.

그 말대로라면, 나는 자주 행복한 편이다.


퇴근길 음악도 그런 순간 중 하나다.

이어폰을 끼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올 때, 마음에 딱 맞는 노래가 흐르면 그날 하루가 다시 정돈되는 기분이 든다.

말보다 음악이 먼저 다가온다.

위로는 꼭 누군가의 말일 필요가 없다는 걸, 음악이 늘 먼저 알려줬다.


날씨 좋은 날, 음악을 들으며 걷는 일은 더할 나위 없다.

사무실의 탁한 공기를 벗어나 천천히 걸어가다 보면, 이상하게 머리가 맑아진다.

고민이 정리된다기보다, 잠시 접어두는 데에 가깝다.

‘몸을 움직여라’는 조언만큼 단순하고 확실한 위로도 드물다.

걷는다는 건, 어쩌면 내 안에 갇혀 있던 생각에서 빠져나오는 방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고양이.

관계에서 지칠 때, 집에 돌아와 나를 기다리는 고양이를 마주하는 순간은 하루 중 가장 따뜻하다.

아무 말도 없지만, 그 존재 자체로 마음이 풀어진다.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데는 조건이 많았지만,

고양이는 내가 늦게 와도, 말이 없어도 나를 기다렸다.


동물은 가진 것에 연연하지 않고, 상처를 주지도 않는다.

사람이 사람에게 지칠 때, 동물의 눈빛은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온다.

세상에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날에도, 그들은 나를 조건 없이 받아준다.

사람이 주지 못하는 위로. 어쩌면 그래서 내가 동물을 좋아하는 걸지도 모른다.

조건 없는 존재의 사랑이란 게 있다면, 그건 아마 동물일 것이다.


사람들은 가끔 묻는다.

“그렇게 작고 소소한 걸로 정말 행복해져?”

나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러니까 내가 가성비 좋은 인간이지.”


우리는 종종 더 큰 걸 원하면서, 지금 눈앞에 있는 작은 기쁨은 놓치고 산다.

하지만 나는 안다.

맥주 한 캔, 이어폰 속 음악, 그리고 집에서 기다리는 고양이.

이 셋이면 하루를 견디기에 충분할 때가 많다는 걸.


‘매일 행복하지는 않지만,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

곰돌이 푸의 말처럼,

하루하루는 작지만 생각보다 자주 반짝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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