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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ook Essay

평등하지 않은 공정한 사회

<자본주의 세미나> 서평

by 아리스

원시사회의 사람들은 함께 채집하고 사냥을 했으며 공동으로 양육이 이루어졌다. 원시인들은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라 생산력이 지나치게 낮았고 생산수단이라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원시사회에서 도구가 발전하고 토지 경작이 가능해지면서 잉여 생산물을 독점하는 소수의 계급이 생겨난다. 이 소수의 계급은 다수의 계급을 독점하는 지배계급으로 세습된다. 지배계급은 생산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피지배계급의 생산물 일부를 수탈하여 생활해 왔다. 생산인구가 일정 수준 이상 유지되어야 했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수는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되어야 했다. 부모가 노예일 경우 자식이 노예인 흙 수저의 신분은 자연의 섭리처럼 세습되었고 이러한 공동체 질서는 안정적이었다.


근대사회로 진입하면서 이러한 노동 배분의 질서가 해체되고 만다. 귀족이나 양반이 모든 걸 차지하며 세습하던 사회를 무너뜨리고, 모든 개인이 제 재산을 가질 수 있게 하자는 생각은 분명 민주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전 사회와 마찬가지로 소수가 배타적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한다. 평등하지만 평등하지 않은 사회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못한 두 계급으로 또다시 나뉘게 된다.


상품은 인간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졌으나 자본주의의 생산의 목적은 자본의 이윤 축적에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노동은 생산하는 가치에 따라 차등화하고, 노동은 서로 돕고 의존하는 관계가 아닌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격차를 흔히 '능력'이라고 표현한다. 본디 능력이란 '차등'에 관한 개념이다. 노동 차등은 인간 차등을 낳고 평등을 삭제한다. 겉모습은 평등한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의 장치는 바로 '공정(fairness)'이다. 공정은 평등을 삼켜버린다. 대기업 자녀들과 먹고살기 바쁜 처지의 자녀들의 교육 환경과 그 출발점은 다르다. 부모의 재산으로부터 교육의 격차가 대물림된다. 대중들은 불평등한 상황에 분노하지만 그럴수록 평등은 더 멀어져 간다. 그것이 공정한 사회라고 한다. 출발점의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은 의미 있지만,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경쟁의 출발점이라는 사실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평등은 출발점의 격차를 줄이는 노력이 아니라 출발점을 없애려는 노력에 닿아 있어야 한다.


단순한 상품유통에서 화폐는 단지 교환을 매개했지만 자본가의 화폐는 스스로 증식한다. 유통과정에서 스스로 증식을 반복하는 자본은 끊임없는 순환 운동으로 제 가치를 불린다. 자본가는 생산수단과 노동자를 구매하여 노동력이라는 잉여가치를 창출해 낸다. 자본가가 획득한 잉여가치는 마르크스 자본주의의 '착취'다. 여기서 착취란 노동자가 만들어 낸 노동의 가치가 임금보다 크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착취의 사전적 의미는 부정의 뜻이 깊지만 자본주의 하에서는 합리적이며 합법적이다. 자본가가 착취한 노동력, 즉 잉여가치는 스스로 증식하는 이윤이다.


사회의 계급은 사라진 지 오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주의는 여전히 '양극화 현상'으로 분명한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신자유주의 이후 최상위 자본가 1과 99 대중의 양극화를 표현한 '1 대 99의 사회'가 근래에는 '10 대 90의 사회'라고 표현한다. 노동시장 연구자들은 이에 해당하는 노동자를 각각 내부자와 외부자라고도 하는데, 마치 성 안의 귀족과 성 밖의 인민들인 셈이다. '10 대 90의 사회'의 의미는 소득 격차를 넘어 다른 차원으로 접어든다. 생산은 10퍼센트의 노동력만으로 가능해지고, 나머지 90퍼센트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다. 상황은 점점 극단화되어가고 있다.


자본가들은 구매자의 필요에 상관없이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화려한 마케팅의 상술로 소비자를 찾는다. 계획적인 생산은 이런 부문에서 낭비되는 막대한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데 사용할 수 있다. 계획적 생산이 소수의 지배나 전체주의로 흐르지 않도록 대중들은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운영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지녀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노쇠한 자본주의와 더불어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는 새로운 사회의 이행기를 살고 있다. 노동을 사유하는 최초의 개인, 새로운 사회에서 우리는 각자의 노동을 사유하며 대체 불가능한 개인으로 거듭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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