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해력 공부> 서평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우리는 문해력이라 부른다. 늙어가는 처지에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배운다고 하면 마치 한글을 배우는 유아기를 떠올리게 되지만 문해력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단순히 글을 읽고 쓰고 대화가 가능하다고 문해력을 길러지는 것이 아니라, 글을 읽고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 문해력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바라보는 세상의 규모도 커진다. 타인의 문해력에 감동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세상에 감동을 주는 일상의 혁신가가 되고 싶은가. 나는 간절히 후자가 되고 싶다.
생각하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감정이 이성을 지배한 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지루한 일상은 생각을 뛰어넘지 않으면 불행하게도 계속 반복될 것이다. 어제와 같은 오늘 그리고 내일이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것이다. 용기는 중요하지만 배움 앞에서의 겸손은 내면의 지식이 결실을 맺도록 도와줄 것이다.
세상에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많지만 뛰어난 제구력으로 마운드를 지배하는 진정한 투수인 피처는 많지 않다. 내가 하고 있는 노력도 아무 데나 던지는 공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노력에 앞서 목표 지점을 발견하고 던지는 기술 하나하나를 쟁취해야 한다. 문해력도 마찬가지다. 시각의 수준과 방향이 결정하는 문해력은 세상에 공평한 풍경과 지식을 각자의 몫으로 가져온다. 문해력이 깊은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의 풍경은 농도가 짙고 풍성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쏟아지는 정보들은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자본가가 기획한 대로 흘러가는 정보를 의심 없이 바라보기만 한다면 그들에게 세뇌당하기 마련이다. 소비와 투기, 비난과 허영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자기만의 메시지를 가슴에 품어야 한다. 세상은 모두에게 같은 방향으로 뛰라고 강요한 적이 없다. 남들과 다른 시선의 방향이 생각의 차이를 만든다. 그 차이는 곧 성장의 격차로 이어진다.
고민은 삶을 힘들게 하고 생각은 삶의 여유를 준다. 고민하는 사람은 언어와 싸우는 사람이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어와 공존하는 사람이다. "상대의 분노를 글로 표현할 수 있다면 그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고, 세상의 흐름을 말로 설명할 수 있다면 스치는 세상의 뒷덜미를 잡아채 원하는 곳으로 방향을 틀 수 있다"라고 저자는 서술한다. 우리가 구사하는 언어는 우리 인생 수준을 결정한다. 언어와 싸움은 그만두고 언어와 공존하며 언어를 이해하라.
언어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인 동시에 최악의 발명품일 수도 있다. 상상력을 제한하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최악일 것이다. 같은 단어를 오래도록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면 남들과 구별되지 않는 일상을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읽히는 언어 너머의 세계를 보라. 고정관념을 버리고 세상이 정의한 것에서 벗어나 언어 그대로를 느끼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언어를 사용하라.
많이 읽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무언가를 읽는다는 것은 대상을 세상에 남기는 일이다. 마땅한 한 줄이 나올 때까지 하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라. 책의 한 줄이어도 좋고, 뜨거운 커피의 연기여도 좋다. 하나를 이해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고 지켜본다면 본질을 제대로 읽을 수 있다. 느낌이라는 것은 느끼는 순간 사라진다. 지적인 읽기는 쓰기로 끝난다. 일상의 글쓰기는 문해력을 키우는 좋은 방법이다. 읽기와 쓰기는 불공평한 세상에서 평등하게 자신의 가치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