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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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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un 25. 2018

01. 모드 전환이 필요해

퇴사와 여행, 그 후

검안기에 눈을 대고 측정을 기다릴 때, 검안사가 시력을 맞추는 동안 사물은 희미하고 불투명하게 보인다. 여행 후 막 돌아온 한국에서의 시간은 내 눈에 맞는 도수를 찾기 전의 상태였다.


좋은 기억들을 쉽게 놓고 싶지 않았다. 여유는 침범당하기 쉬웠다. 돌아온 첫 주엔 바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럴 수도 없었다. 뉴질랜드는 시차가 3시간, 호주는 1시간, 일본은 0시간이라 시차적응이 필요한 건 아니었다. 괜찮을 거라 생각했고 첫 밤은 그럭저럭 잘 잤다. 긴장이 풀린 건 둘째 날이었는지, 초저녁부터 잠들었지만 다음날 정오가 지나도록 깨지 못했다. '왜 이러지? 잠 잘자며 다녔는데? 쉬엄쉬엄 다녔는데?' 중간중간 깨면서도 몸이 무거워 일어날 수 없었다. 잠결에 화장실을 가다가 10평도 안 되는 작은 집에서 길을 잃었다. 여기가 어디지? 다시 침대로 돌아와 멍하니 앉았다. 아, 집이구나.


일종의 공간 적응인 걸까? 그렇게 며칠을 헤맸다. 내내 집에서 보내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지도교수 논문 모임이 있어 집을 나섰는데, 거의 다 도착해서야 다음 주임을 알았다. 그나마 집을 나선 김에 몇 권 책을 빌렸고, 이게 아니었으면 정말 아무것도 안 했을 것 같다. 또 다른 약속은 까맣게 잊고 있다가 전화를 받고서야 알아챈 일도 있었다.


집에 있는 동안 청소를 했다. 창틀이나 침대 밑을 닦았다. 냉장고, 세탁기, 밥솥 내부를 세척했다. 엄마에게 맡겨둔 화분을 찾아오고, 가구 위치를 바꿨다. 비워둔 냉장고를 채우느라 장을 보았고, 계절에 맞는 옷도 몇 가지 골랐다. 일상을 준비한다는 의미였으나, 공부하기 전에 책상 정리에 몰두하는 일과 비슷했다. '본격적'인 할 일에 앞서서, 그 일들을 다시금 미뤄둔 채 엉뚱한 일에 매달린 셈이다.


일다운 일이 있다면 여행의 기록들을 뒤적여 응모를 한 것. 몇 개의 출판사에 기획서를 보내보고, 가입했던 여행카페에서 마침 진행 중인 사진공모전에도 찍은 사진을 내보았다. '시험 삼아'라는 생각이었지만, 기대하는 마음이 없진 않았다. 보내고 나니 이렇게 해볼걸 저렇게 해볼걸 생각이 들긴 했지만. 특히 글은 퇴고나 재구성을 하는데 게으른 게 부끄러웠다. 연락이 없으면 다시 정리를 해보리라.


뉴질랜드 여행 마지막 날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여행 중 듣던 팟캐스트 빨간 책방에 사연을 보냈었는데 지난 방송 때 소개가 되었다. 보낸 시간대로라면 그 전 녹음 때 소개가 되었어야 하는 지라 기대 없이 듣다가 갑자가 내 이야기가 나와서 깜짝 놀랐다. 기분 좋은 놀람이었다. 돌아와서의 응모들이 그렇게 좋은 소식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안되더라도 다음, 또 다음을 만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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