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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퇴사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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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아 Jul 09. 2018

02. 자유를 꿈꾸는 자에게 가족의 존재

퇴사와 여행, 그 후

우리 가족의 역사와 문화는 전형적인 데가 있다.


심하다 싶을 정도의 부부싸움이나, (요즘 기준으론 위험한 수준이지만 당시에는) 용인 가능한 수준으로 자녀에게 행해지던 매질과 욕설도 종종 있곤 했지만 대개는 무심하고 메마른 일상이 유지됐다. 그러던 것이 90년대 후반 아버지가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실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족은 분리됐다. 정확히는 아버지가 떠났다. 엄마와 남은 세 자매는 나이 차가 대략 5년씩으로, 터울이 커서 그런지 위치에 따른 성향이 선명했다. 책임감 많고 권위적이며 때론 까칠한 첫째, 귀엽고 발랄하며 새침하면서 야무진 막내. 둘째는 가운데 끼어 눈치를 잘 보고 내향성이 강하지면서도 자기만의 세계가 강했다. 나는 둘째였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에 첫째가 부모의 역할을 분담했다. 워낙에도 공부든 예체능이든 잘하던 첫째는 장학금을 받고, 과외를 하며 살림에 보탬을 주었다. 둘째는 제 용돈 정도는 아르바이트로 해결하긴 했지만, 동아리 활동이니 여행이니 하고 싶은 일은 미루지 않았다. 나중에 첫째가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못해서 너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라고 했는데, 이렇게 놀 줄은 몰랐다'라고 후회하는 말을 했는데, 둘째로서는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둘째가 기억하는 건 첫째가 자신이 중학생 때도, 고등학생 때도, 대학생 때도, 졸업 후에도 언제나 '너는 어려서 좋겠다' 말하곤 했다는 점이었다. 항상 어리지 않아 뭘 못한다는 언니를 보며 둘째는 지금 뿐 아니라 언니가 그 말을 하는 저 나이가 되어도 그런 후회는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느 날 둘째는 자신이 첫째에게 가졌던 마음을 막내가 자신에게 가졌던 것을 알았다. 집으로 우편으로 날아온(포털로 확인할 수 있는 데도 왜 우편을 보내는지 모르겠지만) 둘째의 성적표에 F가 뜬 일로 첫째와 엄마가 근심하며 상의하는 장면을 보고 막내는 '둘째 언니처럼 되지 말아야겠다'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던 것이다.


둘째가 100일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모두들, 놀만큼 놀았으니 이젠 취업하겠거니 기대했다. 그러나 둘째는 비어 가는 통장을 보면서도 태평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궁리를 했다. 빚은 없고 내 한 몸 건사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런 둘째에게 막내가 찾아왔다. 중립적인 입장에서 첫째의 의견을 전하는 것 같았지만, 결론은 '저 하나(만!) 건사하는 태도는 다른 형제들에게 책임을 지운다'였다. 그것이 물질이든, 가족 구성원으로서 혹은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의무이든.


막내는 넉 달 뒤 혼인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결혼을 앞두고는 갑자기 효심이 부쩍 생기나 보다, 하고 둘째는 생각했다. 결혼을 하면서 배우자의 부모에 대한 의무가 생기고, 그러면서 응당 내 부모도 비슷한 정도의 관심을 가져야 될 것 같고, 그러면 자신과 같지 않은 다른 (결혼하지 않은) 형제가 못마땅해지는 순서였다.


언니가 결혼한 후 부모에게 용돈을 드리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동생들이 동참할 것을 요구했을 땐 군말 없이 따랐다. 돈이 문제가 된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막내는 본인이 결혼하며 떠나는 집에 내가 들어오길 바란다고, 직업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내 삶의 형태와 가치관까지 건드렸다. 흘려들을 수도 있었지만, 부모나 언니의 것과 달리 동생의 말엔 마음이 복잡해졌다. 나보다 어린 이에게 부담을 준다는 것이, 철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미안했다.


동생이 돌아간 밤, 집 앞 개천가를 자정이 다되도록 걷고 또 걸었다. 가족들이 바라는 삶을 잠시 상상만 해보았는데도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혼란한 상태로 잠이 들었고, 악몽을 꾸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여행 중 결심을 밀고 나가기로 했다. 적어도 당분간은.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럴수록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힘든 것은 타인의 간섭 그 자체보다는, 그에 맞서 당당할 수 없는, 내 결심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는 현재 때문이었다.


가족을 핑계를 삼지도,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말아야 하는 데는, 그 균형을 잡는 데는, '나'에 대한 탐구가 필요했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넘어, 내가 어떤 마음을 먹는 이유는 무엇인지, 결심하거나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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