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레몬 맥주

인생 맥주

by 유호현 작가

1992년 추석. 네 살 때까지 외갓집이었던 곳에 부모님의 재혼 이후 11년 만에 다시 가게 되었다. 외손주의 귀환이었다.

결국은 친해지게 될 피붙이들이었지만, 그날의 나는 낯선 이들 사이에서 손님 같았다. 사촌 동생들에게도 존댓말을 했을 정도니 뭐.

그때 어머니가 맥주 한 잔을 가져오셨다. 중학생이던 나에게 말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초등학생 시절, 큰집에서 보리차인 줄 알고 마셨던 미지근하고 김 빠진 맥주의 끔찍한 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내 아들이면, 싫어할 수 없는 맛이지."


저렇게까지 권하시는데 딱 한 모금 정도는 눈감고 마셔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나보고 잔을 두 손으로 잡아보라고 하셨다.


"적당히 시원하지? 그리고 한 번에 마실 수 있는 양이고?"

"..."

"그러니깐 꺾지 말고 쭈욱!"


나는 어머니를 믿어보기로 했다. 그대로 잔을 들이켰다. 그 맛은?


나는 어머니 아들이 맞았다.


이미 몇 잔을 드신 어머니는 잘했다며 내 볼에다 뽀뽀를 했다. 난 11년 만의 '엄마의 뽀뽀뽀'를 받고는 기분이 묘했다.

어? 그럼 오늘부터 맥주 너랑 나랑 1일? 계속 마시고 싶은 기대가 슬금슬금 올라올 때 어머니가 선을 정하셨다.

“성인이 될 때까지는 매년 추석에 딱 한잔씩만. “

그리고 성인이신 어머니는 여러 잔을 마시러 이모들에게 가셨다.


이십 대 후반, 호가든으로 세계 맥주에 입문했다. 이후 수많은 맥주의 다양한 풍미에 반해버렸다. 난 그중에서도 호가든과 기네스를 가장 좋아한다.


기네스는 따르고 나서 부드러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 호가든은 바닥에 남은 효모를 흔들어 따라야 한다. 그리고 그 두 개를 잘 섞으면 더티호라는 칵테일이 된다. 호가든은 낮이고, 기네스는 밤이다. 낮의 찬란한 기억 위에 밤의 고요한 무게를 얹는 것. 섞이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더티호. 그런데 내가 만드는 더티호는 주로 더티했다. 이제는 뭐 조금은 봐줄 만 하지만.


엄마가 살아계셨다면 이런 얘기들을 잔뜩 해보았을 것이다. 맥주 앞에서 허세란 허세는 다 부려봤을 텐데.

엄마는 내 허세를 보며 또 뽀뽀뽀를 해주었을까? 아니면 내 친구 엄마처럼 등짝 스매쉬란 것을 한 번 날려주셨을까?

그 모든 허세를 부릴 수 없는 지금, 그 아쉬움이 유독 쓰게 느껴진다.

우리 모자 사이는 처음엔 이별로, 그리고 사별로 꺾이고 말았다.


오늘 내가 마신 건 대구 유명 맛집의 레몬 맥주다. 상큼한 산미가 맥주의 쌉싸름한 끝맛을 부드럽게 감싼다.

잔 벽을 따라 얇게 맺힌 살얼음이 보이는가? 결코 거북할 정도로 차갑지 않다. 마치 온도를 설계한 것 같다.

내가 제일 맛있게 마셔본 맥주 다섯 개를 꼽으라면 무조건 들어간다.

엄마는 레몬 맥주를 마셔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내 마음에 살아 있는 엄마에게 이 잔을 건넨다.


"내 엄마이기 때문에, 싫어할 수 없는 맛이죠."


이제는 엄마보다 한 살 많은 오빠로서.

그래서 당신을 더 이해하게 되고, 더 사랑하게 된 아들로서.

꺾였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그 마음만큼은.


꺾지 말고, 쭈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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