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례의 주인공

오 캡틴 마이 캡틴!

by 유호현 작가

아내는 키팅 쌤 이야기를 지금도 한다.

아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담임이었던 체육 선생님.

입시가 중요한 시기였기에, 몇몇 아이들은 체육 선생님이 담임이라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단다.

하지만 3학년 1반 53명의 키팅이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선생님들 사이에는 날짜에 따라 번호를 부르는 일종의 루틴이 있었다.

1일이면 1번, 15일이면 15번.

"오늘은 1일이니깐 1번이 나와서 문제 풀어봐."

"1번이 한번 읽어봐."

오늘의 날짜는 곧 오늘의 타깃을 뜻했다. 그 시절 아내는 번호 호명이 참 피곤했다고 한다.

그날은 29일이었다.

29번인 아내는 하루 종일 긴장 속에서 지냈다. 어떤 질문을 받을까? 어떤 어려운 문제를 풀라고 할까?

아니나 다를까 최소 네 번 이상 호명받은 아내는 지친 얼굴로 종례 시간을 기다렸다.

담임 선생님은 들어오자마자 부르셨다.

"29번."

'아, 아직도 하나 남았구나.'

긴 한숨과 함께 고개를 드는데, 선생님이 다가와 종이에 싼 따뜻한 군고구마 하나를 건네셨다.

"오늘 하루 수고했어."

질문의 타깃이 종례의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날 교실 공기는 바닥에 가라앉은 분필 가루 냄새 대신 군고구마의 따뜻한 향기로 채워졌다. 그 향은 아내의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고 지금까지도 그 향기를 품은 채 살아간다.

(이외에도 수많은 미담이 있지만 다음을 기약한다)

향기로운 기억이 그리운 향수가 되고, 결국 아내의 삶의 향방이 된 것이다.



우리 부부에게도 군고구마처럼 향기로운 기억이 있다.

몇 년 전, 경제적으로 힘들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아내의 주머니에 10만 원을 꽂아주고 가신 분이 있다.

본인은 우리보다 더 어려운 형편이었는데 거절하는 아내에게 '제발 좀 받아!' 그러셨다고 한다.

그리고 저녁에 , 용기를 잃지 말라는 카톡도.

그 일이 있고 5년쯤 지난 어느 날. 그 언니와 아내가 같이 식사하기로 했다.

우린 이제 맛난 식사를 대접할 상황이 되었고 아내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하지만 언니가 30분이나 늦게 도착한 것이다. 늦은 이유는 가스 점검을 스무 번이나 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불안 증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본인도 괴로워 미치겠다는 것이다.

그날, 아내는 나와 상의를 했다. 꼭 도와주고 싶다고.

하지만 약간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장인어른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장례 이후 병원은 되도록이면 피하고 싶었다. 익숙하지 않은 분야라 더더욱 그랬다.

잠깐 생각하던 아내가 말했다.

"그 10만 원."

아내는 그렇게만 말하고 방긋 웃었다. 나도 답가를 불러줘야 했다.

"그래 그 10만 원."

부부는 일심동체. 이후의 결정을 설명으로 흐릴 필요가 없었다.

먼저, 같은 어려움을 겪은 지인에게 병원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전화를 걸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우리가 알게 된 상세한 정보를 조심스레 다 전했다.

그 언니는 이게 치료가 필요한 상태인 줄 몰랐다며 언제 마음의 준비가 되면 받아보겠다고 했다.

치료는 권하는 사람에게도, 받는 사람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아내가 제안했다.

"혹시 언제 시간 되세요? 제가 같이 따라갈게요."

그 언니는 한참 망설이다 대답했다.

"바쁠 텐데..."

"연차 내면 되니까, 편하신 시간만 알려주세요."

약속을 잡고 아내는 언니의 장점과 고마운 점을 떠올렸다.

그날 하루, 칭찬을 퍼붓고 올 작정이었다. 용기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서는 조용히 손만 꼭 잡고 다녔다고 한다.

그 친절하고 겸손한 의사 선생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후 언니가 스스로 갈 수 있다고 말할 때까지 아내는 매달 한 번씩, 총 세 번을 함께했다.

다행히 약도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아내는 그 언니의 힘든 기억에 종례가 오길 바랐다.

그리고 예전에 받은 군고구마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한 개 돌려준 것뿐이다.

사실, 당시 어렵던 우리 상황에 비하자면 우리가 받은 군고구마는 한 박스였다.

둘은 그렇게 서로의 키팅 쌤이 되었다.



향기, 향수, 향방

군고구마 하나의 따뜻함이 하루를 견디게 하고, 결국 인생의 방향까지 바꾸게 된다.

오늘도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게 29번이 되어 하루를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말해줄 수 있다면.

"오늘 하루, 수고했어."

그 한마디가

그날의 향기가 되고,

그리움의 향수가 되며,

삶의 향방이 될지도 모른다.





*그 언니분께 허락을 구하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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