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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하려다 보니...

by 유호현 작가

친히 활과 화살을 가지고 말을 달려 노루를 쏘다가 말이 거꾸러짐으로 인하여 말에서 떨어졌으나 상하지는 않았다.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하였다.


태종 4년(1404) 2월 8일


조선 시대에는 사관이라는 벼슬이 있었다. 왕의 언행을 기록해 역사의 진실을 보존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불편한 시스템이 조선왕조 500년이라는 긴 시간의 동력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철혈 군주 태종은 말에서 떨어졌을 때 아픔이 먼저였을까? 사관 민인생의 얼굴이 떠올랐을까?

'고기'가 아니면 밥을 드시지 않았다던 대왕님이 'ㄱ'을 첫 자음으로 한 것은 혹시 관련이 있을까?

신하들에겐 두려운 존재였던 숙종이 고양이 금손이를 부르는 목소리는 갓 지은 솜이불이 온돌 위에서 피어나는 느낌이었을까?

실록은 왕들의 인간적인 면모도 알게 해 주었다. 왕들이 견뎠던 그 불편함이 '신뢰할 수 있는 기록'을 만든 것이다.


6년 전, 나에게도 불편함이 찾아왔다.

역류성 식도염.

평생 큰 병 없이 살아왔던 나는 이 불청객이 낯설고 두려웠다.


약만 먹어서는 잘 낫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우리 부부는 사관 시스템을 가동하기로 했다.


원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냉수 한 잔을 3초 안에 벌컥벌컥 마시는 것이 루틴이었다. 이제는 잠들기 전, 전기 포트에 물을 받아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양치 후, 온수를 5분에 걸쳐 천천히 마신다.

-건강은 인내로부터 시작되느니-

성급했던 내가 건강하려는 나에게 내리는 첫 교지(敎旨)다.


식탁에는 브라질넛과 토마토즙이 놓여 있다. 맛없는 브라질넛은 눈에 띄지 않으면 절대 먹지 않을 것을 알기에 가장 잘 보이는 자리로 임명했다. 매일 두 알을 먹는다. 생토마토를 데쳐 먹자니 출근 시간 전에 너무 번거로웠다. 이대로 가다간 아침 루틴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것이 뻔했다. 몸값 비싼 토마토 과채주스를 등용하기로 했다.


냉장고에는 전날 소분해 둔 샐러드가 기다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스는 케첩과 마요네즈 범벅이다. 하지만 사관은 자신의 의견을 기록에 섞을 수 없다. 올리브유와 발사믹만 뿌려서 먹기로 한다.


나머지 음식은 아내가 준비해 준다. 삶은 계란일 수 있고 계란찜이기도 하며, 때론 프라이가 특식으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구운 밤이나 과일 한 접시를 가장 선호한다. 그 누구도 사초를 열람할 수 없었듯 이 기록은 그 전날 알 수 없다. 당일 아침, 아내의 기분에 따라 편찬된다.


건강이 회복되자 운동이라는 사관을 등용했다. 매일 1만 보 이상 걷기나 실내 자전거를 거르지 않았고 근력 운동도 꾸준히 했다. 그러자 생애 처음으로 턱걸이 한 개에 성공했다. 한 개라니 웃길지 모르지만 186cm 92kg 거구의 중년 남자가 턱걸이를 비로소 하나 해낸 것은 개인 실록에 기록될 정도의 사건이다.

20대에도 못하던 팔 굽혀 펴기 30개를 논스톱으로 해낼 수 있게 되었고, 어깨너비는 52cm가 되었으며 피부도 많이 개선되었다.


일주일 중 4일은 11시 전에 잠들고 때론 아침에 '번쩍' 눈을 뜬다. 이 기상 감각이 얼마나 짜릿한지 모른다.

몸이 건강해지자 정신이 맑아졌다. 올해 4월부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역류성 식도염 탓? 덕분? 탓분???

불편함이 나를 바꾸었다. 그래도 재발할 때마다 반갑지는 않다. 민인생을 보는 태종 이방원의 눈빛이 어땠을지 짐작이 간다.


아내에게 농담 삼아 말했다.


"내가 역류성 식도염에 걸린 것은 축복이었을지도."


아내는 늘 한결같다.


"어휴!"


p.s. 11월 말에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하나 또 받았어요. 동화, 시 공모전은 본선에도 못 올라가고 다 떨어졌는데 에세이가 효자네요. 이 영광을 역류성 식도염에게... 돌렸다간 계란 프라이가 끊기겠죠? 역류성 식도염. 이제 그만 퇴직시켜주고 싶습니다.

개인적인 경험입니다. 역류성 식도염을 앓는 분들은 제 식단을 따라하실 때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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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소풍 반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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