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의 잔고

by 유호현 작가

지난주 월요일 아침에 왼쪽 눈이 유난히 많이 충혈되어 있었다. 홍채 한쪽이 희게 변해 있었다. 국경이 침범당한 것처럼 아침이 소란했다.


또 각막염이다.


최근 여러 가지 일이 한꺼번에 몰려와 유난히 피곤했다. 곧 터질 화산처럼 피로가 웅크리고 있었을 것이다. 눈에 퍼진 붉은 핏줄이 꼭 마그마 같았다.


병원은 회사에서 걸어서 15분 거리다. 번거로운 것은 이동이 아니었다. 걱정에 온종일 매여있으면서 병원에 가지 않을 명분을 인터넷에서 찾아내려는 그 부지런함이 번거로웠다. 내가 듣고 싶은 조언만 아이 쇼핑하듯 훑으며 시간과 체력을 다 써버리고 결국은 병원에 가게 될 결말이 억울했다.


병원에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간호사가 있었다. 나는 괜히 깍듯하게 인사했다. 지나친 예의를 차렸으니, 있는 병도 지나쳐주길 바라고 있었다. 이럴 거면 병원은 왜 왔는지라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이 났다.

내 건강의 잔고는 얼마나 남았을까라는 불안과 함께 안경을 낀 상태에서 시력 검사부터 했다. 놀랍게도 작은 숫자도 척척 읽어냈다. 다만 1.2 구간으로 향했을 때 흐릿했다. 중간고사 보는 학생처럼 어렴풋이 찍어보았다. 간호사가 다른 눈으로 바꾸라는 것을 보니 틀린 것 같았다. 나 같은 환자가 많은지 호통도, 적막도 없었다.


다음은 안압 검사였다. 안압이 높으면 내가 가장 걱정하는 병을 의심해야 한다. 검사가 끝난 후 숫자만 말해주길래 무슨 의미인지 물었다.

“정상입니다.”

“네?”

“두 눈 다 정상입니다.”

“어? 진짜요?”

세리머니라도 하고 싶은데 간호사는 무표정했다. 잠시 대기하고 있으면 이름을 불러주겠다는 말만 사무적으로 남겼다.


의사는 70대로 보였다. 눈 상태가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관리는 잘해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치 내과에 감기로 온 사람 대하는 태도 같아서 안심이 되었다.


이번에도 아니구나. 아직 잔고가 남았구나.


처음보다 더 정중하게 인사한 후 병원 문을 나서는데 ‘잔고’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이 뒤늦게 신경 쓰였다.


병원 바로 맞은편에 약국이 있었다. 의사보다 훨씬 나이가 많을 것 같은 약사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다 뒤늦은 목례를 했다.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점안약의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약국을 나서며 뭉클함이 느껴졌다.


나이 많은 의사와 그보다 더 연로한 약사.

"저들은 오래 함께 해왔겠구나."


내 몸의 크고 작은 지체들. 모두 따로 떨어져 있지만 누구보다 가까운 이웃들이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생겨난 것이 없고 태어날 때부터 함께 해왔다.

잔고라는 말이 이별을 암시하는 것처럼 느껴져 잠시 섬뜩해졌다. 이건 계속 함께 가기 위한 부탁일 것이다. 함부로 써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약을 점안하고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눈의 충혈이 가라앉았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아직은 괜찮다. 다만, 조심해서 써 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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