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칭찬의 기준

나다움이라는 인정

by 아를밤

사물에 대한 칭찬은 대개 닮음의 언어로 이루어진다.

잘 그린 그림에는 사진 같다고 말하고,

잘 찍은 사진에는 그림 같다고 말한다.

정교한 인형은 사람 같다고 하고,

단정한 사람에게는 인형 같다고 한다.

우리는 늘 정반대의 것을 끌어와야만

최고의 표현에 도달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것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이.


어쩌면 이런 언어의 습관은

하나의 전제를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 자신만으로는 완전해질 수 없다는 전제.

그래서 늘 다른 무엇을 불러오는 건 아닐까.

그림은 사진을 향해, 사진은 그림을 향해.

인형은 사람을 향해, 사람은 인형을 향해.

그렇게 비교의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잘했다”는 말이 허락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 지점에서 조금 멈칫했다.

왜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칭찬하지 못할까.

왜 늘 다른 기준을 빌려와야만 할까.


그러다 내 생각이 도달한 곳은 ‘나’였다.

이상하게도 ‘나’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람들은 “너 누구 같아”라고 말할때보다

“역시 너다워”라고 말할 때 더 큰 긍정을 담는다.

누구처럼 되었다는 말보다,

'너답다'는 말이 더 따뜻하고 안도감을 준다.


‘나답다’는 비교가 아니라 인정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말은 다른 무엇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비교의 과정도 거치지 않는다.

다만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로 긍정한다.

“역시 너다워”라는 말은,

너는 너로 충분하다는 선언에 가깝다.


거부할수 없는 인정욕구에 대한 충족때문일까.

그래서 그 말은 묘하게 힘이 있다.

누구처럼 예쁠 필요도 없고,

누구처럼 잘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나답게 생기면 되고,

나답게 말하면 되고, 나답게 해내면 된다.

내가 나일 때가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라면,

더 이상 바깥을 향해 기준을 찾지 않아도 된다.


이 생각에 이르자 조금은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펴지는 느낌이 들었다.

현실에 치여 자꾸만 누군가를 닮아야 할 것 같던

피로감도 잠시 사라진다.

비교 대신 인정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나'라는 기준이 다시 또렷해진다.

물론 스스로를 온전히 인정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누군가를 끊임없이 좇는 피로에 비할까.


그렇다면 나는,

내일도 나답게 살아가 보려 한다.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로 인정받기 위해.

그리고 무엇보다, 나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주기 위해.


KakaoTalk_20260222_224852916.png "비로소 나를 마주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유 너머, 이수의 진짜 삶이 이곳에서 이어집니다. 시린 겨울을 지나 마주할 따뜻한 온기를 함께 찾아주시겠습니까?"

[마지막 계절이 지나 당신이 있었다] 첫 회부터 정주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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