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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희 Jun 19. 2023

푸른 숲

잠을 자는 사람들

우산도를 떠난 뒤 두 번째로 간 곳은 초록이 무성한 숲이었다. 5일 정도를 걸어서 도착했는데, 형체와 주위가 불분명하게 보이며 에메랄드 빛이 섞인 자주색의 안개가 둘러싸고 있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숲 안으로 들어섰다. 숲 그 안은 온통 녹음이 울창하게 자라나는 중이었다. 한참을 걸은 듯한데 사람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여상하고 불안했다. 숲이라도 내가 그동안 알던 숲과는 다른 것 마냥 생경한 공기가 나를 머리 위에서부터 압박해 왔다. 푸른색이 섞인 짙은 녹색의 이끼가 땅을 전부 덮고 있었다. 한가득 숨을 들이쉬면 박하향과 장미꽃향이 섞인 나무 내음이 폐부를 가득 채웠다. 초조했던 마음이 살짝 풀어졌다. 정신을 편안하게 해주는 향이었다.


사람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곳곳에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다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나를 경계하는 나무 뒤로 숨는 작은 다람쥐의 눈을 보았고, 걸을 때마다 발아래 부유하는 이끼와 잔디, 풀잎에 매달린 이슬방울과 날개를 펄럭이는 파랗고 흰나비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조금 더 걸었다. 아무도 오지 않은 길을 새로이 밟아나가는 기분이었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저 멀리 나무로 빙 둘러싸인 둥근 평원이 보였다. 그 안에 있는 순록 두 마리가 보였다. 나뭇잎을 뜯어먹던 순록과 아기 순록이 인기척을 느꼈는지 후다닥 나무 뒤로 사라졌다. 걸을 만큼 걸어서 그런지 고단함이 몰려왔다. 고개를 들면 나뭇잎들 사이로 햇빛이 부서져 내렸다. 얼굴에 내려앉아 어루만지는 빛을 느끼며 눈꺼풀이 느릿느릿 감겼다. 왜인지 낮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한참 꿈을 꾸었다. 내용은 뚜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푸른 바다에 첨벙 빠져 깊게 가라앉는 꿈이었다. 끝없이 가라앉다가 어느 순간 눈을 들어보니 파란 물결 사이 손을 흔드는 산호초와 말미잘, 무리를 지어 바삐 움직이는 물고기들, 그리고 거대한 고래가 있었다. 고래는 정면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그 고래는 왜인지 고요하고도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한 기개를 눈에 담고 있어서, 나는 꼭 우주가 태어난 이래 세상을 움직인 가장 정갈하고 단아한 지혜와 마주한 기분이었다. 고래는 점점 다가왔다. 우리가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물결이 춤을 추듯 원을 그리며 둘러싸더니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은하수처럼 펼쳐지는 물방울들이 짙은 남색과 수정 같은 투명한 녹색을 띠면서 눈앞을 어지럽혔다. 그때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들려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젊은 남자가 뭐라고 말을 하며 팔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묶음에서 흘러나온 몇 가닥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늘어 뜨러 졌다. 속눈썹이 빼곡하게 들어서있어 남자의 눈은 깊은 음영을 자아냈다. 무엇보다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적갈색의 사막 모래 같이 태양을 온통 집어삼킨 듯했다. 사람의 눈동자 안에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를 담을 수도 있구나 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멍하게 눈을 깜박였다.


“제 목소리가 들리세요?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떻게 여길 오신 건지는 몰라도 얼른 일어나야 합니다. “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점차 또렷하게 들려왔다. 정신이 들자 아까 낮에 본 평원에서 내가 그대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기분에 미간이 찡그려졌다. 나는 낮잠을 자주 자는 편이 아니었다. 아무리 졸려도 낯선 밖에서 그대로 누워 잘 만큼 잠에 약한 건 아니었는데.


내가 정신이 들었다고 생각한 건지 젊은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손을 잡고 일어나라는 뜻인 듯했다. 손을 잡자 남자가 힘을 주어 나를 일으켜주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깜빡 잠이 들었나 보군요. 이 숲에 사시는 분이신가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며 나보다 약간 높이 있는 남자의 눈을 마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살짝 커진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남자가 살포시 웃으며 말을 해왔다.


"네. 이곳은 저희 마을이 사는 숲이에요. 푸른 숲이라고 해요. 푸른 숲에 밖의 사람이 들어온 것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푸른 숲으로 오신 게 맞으신가요? “


남자의 말투는 사뭇 공손하게 느껴지리만큼 진중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듯한 눈 맞춤과 말투에서 나는 알게 모르게 가졌던 긴장감을 조금씩 풀어내었다.


"네, 맞아요. 저는 여행자입니다. 비밀 지도에 그려진 '푸른 숲'을 보고 이곳을 찾아오기 위해 먼 길을 떠나 왔어요. 숲 안으로 들어와 거닐다가 이곳에 도착했어요."

"그러시군요. 숲에 여행자가 온 것은 정말로 오래된 일이라 믿기지 않네요. 그리고 잠에 드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 얘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요. 일단 저희 숲에 오셨으니 숲을 소개해 드리는 게 좋겠네요."


남자는 숨을 한번 들이쉬고 내쉬더니 곧이어 말했다.


"저의 이름은, 아신입니다."


아신은 따라오라는 듯 오른팔을 평원을 가로질러 북쪽으로 나있는 길로 들어 가리켰다. 앞서 걷는 아신을 따라 걸었다. 길가에는 사람의 흔적이 있던 듯 없던 듯 희끄무리한 발자국들과 지나다닌 흔적이 있었고, 그 옆마다 키가 작은 꽃들이 고개를 들고 피어나 있었다. 새파란 잎들과 형형색색의 버섯들, 사뿐히 날아다니는 나비와 벌들이 눈과 코를 간지럽혔다. 그렇게 얼마나 걸어 숲을 들어갔을까. 키가 큰 나무들로 둘러싸인 넓은 땅에 대나무로 지어진 네모난 집들이 여러 채 보이기 시작했다. 아신은 이곳이 푸른 숲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가장 가운데에 있는 집으로 곧장 안내했다. 이상한 점은 나와 아신을 제외한 어떤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 우거진 나무에서 나는 눅눅하면서 어우러지듯 스며드는 향이 가득했다. 선반에는 말린 나뭇잎과 꽃잎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고 고동색의 나무로 된 책상과 의자가 정중앙에 놓여 있었다. 아신은 내게 의자에 앉으라고 권하더니, 주방으로 이어지는 듯한 문으로 사라졌다. 분명 사람이 생활하는 흔적은 있지만 왜인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마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 아신이 손에 찻잔 2개를 들고 돌아왔다. 찻잔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꽃차가 담겨 있었다. 고맙다고 인사를 한 뒤 한 모금 마시자 달콤 씁쓸한 맛과 향이 동시에 속을 파고들었다.


아신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 숲의 사람들은 모두 잠을 잔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하지만 다른 점은, 각자 잠이 드는 시간과 깨어나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정오에 잠들어 꼬박 사흘을 누워있다가 새벽에 깨어난다. 어떤 이는 새벽 3시에 잠들어 하루종일 잠들은 후 다시 새벽 3시에 깨어났다. 그 후에는 깨어있는 채로 먹고 마시고 일과 휴식을 취하며 지내다가 졸리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똑같은 시각에 잠이 들었다.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다. 바로 가족끼리도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아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 이름은 르우였다. 둘이 만난 것은 십 년 전 일식이 있어 해가 뜨지 않았던 날이었다. 둘은 서로의 이름을 나누고 깜깜한 하늘 아래 달빛을 의지하여 어슴푸레 보이는 숲길을 함께 걸었다. 둘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늘을 가로질러 반원을 그리는 무지개의 남은 반쪽에 대해서 궁금해했다. 그걸 삼켜버린 바다가 있을지, 그 바다는 어떤 색일지. 숲과 바다의 경계에는 누가 살고 있을지, 그곳을 가려면 몇 밤을 걸어야 할지. 한 명이 물으면 한 명이 대답했고 대답한 한 명이 질문하면 다른 한 명이 또 대답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사랑에 빠졌다. 친구를 사귀고 가족과 머릴 맞대고 이야기를 하고 연인에게 입을 맞추었다. 때로 순간은 영원을 닮는다. 그래서 그 순간에 평생을 욱여넣고 싶어졌다. 사랑을 알기 전의 세상과 알고 난 후의 세상은 변한 게 없지만 모든 게 달라지는 법이었다. 영원을 바라보는 마음은 순수한 열망이어서 진흙 사이 자라난 민들레와 같이 꿋꿋했다.


다시금 일식이 오기까지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일식은 불규칙하고 아주 오랜 시간 후에 돌아서 왔기 때문에 모두가 다음 세대 이전까지는 볼 수 없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글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잠든 사이에 그 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아신은 편지 한 뭉치를 들고 와서는 몇 개를 펼쳐서 내게 보여주었다. 아신이 쓴 것도 있었고, 르우가 쓴 것도 있었다.


르우에게.

순간이 영원할 때가 있어. 해와 달이 서로를 가릴 때에도 별빛은 반짝였고 숲의 반딧불이들이 주위를 맴돌았지. 결국 순간이 모이면 영원이 될 테니까. 내가 너를 영원하게 여긴다고 해도 모순은 아닐 거야. 요즘 밖의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을 들으면 마치 세계가 아주 빠르게 변하고 있는 듯 해. 이 숲에서 태어나 나무들 사이에 앉아 너에게 편지를 쓰는 나는 꼭 멈추어 더 이상 선을 그리지 않는 나이테 같아. 여기에 이렇게 가만히 머물러 있어도 되는 걸까? 걱정은 오늘을 살게 할 그 어떤 힘도 주지 못한다는 걸 알아. 내가 잠에서 깨어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우려낸 차의 향을 맡으며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만히 생각하는 동안에도 너는 꿈을 꾸고 있겠지. 사람은 꿈만으로는 살아갈 순 없다고 해. 그래서 우리는 자꾸 꿈을 꿨다가도 잠에서 깨어나나 봐. 그렇지만 너의 꿈이 온전한 안식이기를 나는 기도해. 그 무엇도 해치지 못하고 두려움을 불어넣지 못할, 색색의 아름다운 빛깔들이 하늘에서 쏟아져내리며 달콤하고 나른한 꽃 향기를 맡으며 기분 좋은 하루를 그리는 꿈이기를. 내가 너에게 전하고 싶은 최선의 사랑을 잊지 않고 만끽할 단잠이기를. 나는 너의 검은 머리칼이 청록색의 은하수가 가로지르는 밤하늘만큼이나 아름다워. 우리는 어쩌면 잠든 서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 뺨에 손을 대고 온기를 전하는 일이 유일한 기쁨일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이 순간들을 영원하도록 살아갈 거야. 고개를 들고 저 멀리 있는 자에게 원망의 말들을 쏟아내고 싶을 때도 너를 마구 흔들어 깨우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기로 했어. 부지런히 또 성실히 너의 이름을 나의 이름 위에 새기고 하루를 사랑으로 가꿔가는 일들을.


아신에게.

너의 기도 덕분인지 나는 무척 개운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어. 아마 아주 좋은 꿈을 꾼 것 같아. 너의 꿈 역시 어떤 작은 불안도 깃들지 않은 행복한 꿈이기를 기도해.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남아있는 것들은 있을 거야. 우리의 숲이 그랬고 우리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이 그랬고 우리가 그럴 거야. 밤이면 집을 밝히는 반딧불이들이 그랬고 낯선 바람의 방향을 알려주던 별들이 그랬고 새로운 물길이 난 곳을 달리던 노루들이 그랬어. 걱정과 무력감이 불시에 우리의 밤을 덮을 때를 막진 못 하겠지만 변하지 않는 게 있는 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너와 난 괜찮을 거야. 그러니 믿어.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기도를 깨뜨릴 순 없어. 우리가 함께 거닌 일식의 밤을 지울 수 없어. 나의 꿈에는 아마 영원히 네가 나올 테니까. 너는 아름답고 반짝이며 좋은 냄새가 나. 잠에 들고 깰 때마다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아. 네가 잠이 들 때 내가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머리를 쓸어 넘겨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원망보다는 감사를 선택하는 오늘을 살기로 하자. 있을 수 없던 하루의 밤을 선물 받아 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으니까. 그보다 큰 기적은 없을 거야, 그렇지? 우리의 숲은 아름답고 수많은 영혼이 잠들고 깨어나곤 해. 나무들은 저마다의 불꽃놀이를 하듯 꽃잎들을 날리고 바람을 일으키며 작은 불꽃들을 가지마다 감싸 안아. 우리는 그 축복 가득한 전통을 잊지 않고 매일을 걸어 나갈 거야. 그러니 오늘도 잠든 너의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이며 기쁜 하루를 시작해. 잘 자, 나의 아름다운 꿈.


푸른 숲의 사람들은 언제쯤 다시 일식이 올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아주 오래전 일식과 비슷한 현상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 그 간격과 예측은 노력해도 알아내지 못했다고. 어떤 이들은 그 하룻밤을 잊고 원래대로 살아가며 깨어 있는 동안에 만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지낸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그 하루를 잊지 못해 괴로워하며 하루하루를 절망에 빠져 보낸다고 한다. 끊임없이 원망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그리고 아신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고 했다. 그저 잠에서 깨어나면 또 주어진 오늘을 감사하고 살아내며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하기. 그 사람을 위해 편지를 쓰고 기도를 하며 마음을 청소하듯 집을 청소하고 따뜻한 차를 우려내어 손님에게 대접하고. 좋아하는 악기를 꺼내 줄을 갈고 음을 정돈하여 그 사람을 떠올리며 노래를 연주하고. 비가 오면 잎들의 녹음이 퍼져나가 하늘을 뒤덮듯 온통 푸른 나의 숲을 지키며 흘러가는 생각들을 붙잡고. 내일이 오는 것도 다음 잠에서 깨는 것도 실상 불안한 일들일뿐이기에 알지 못했던 까만 밤하늘이 왔던 날을 생각하며 깨어난 아침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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