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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희 Jul 31. 2023

돌길과 푸른 물가

오늘의 길

나는 이제 마지막 숨겨진 지도의 별로 향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보랏빛 성이었다. 보랏빛 성으로 가기까지는 돌길과 푸른 물가를 지나야 했다. 먼저 마주한 것은 까맣고 하얀 또는 그 사이 회색을 띠는 수많은 돌들이 깔린 돌길이었다. 돌길의 입구에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언뜻 봐도 오래돼 보이는 나무판자에 반 이상 지워진 글씨들이 보였다. 언젠가 어렸을 때 엄마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가장 작은 것들이 가장 많은 세상의 곤혹함을 보는 이유를 아니? 그것은 바로 … 때문이란다.” 떠듬떠듬 눈에 보이는 글씨들로 단어를 조합해서 문장을 읽어보았다. ‘돌 하나는 과거의 단편이다. 끝없이 이어진다. 돌 하나는 현존의 이유다. 가장 작고도 날카로운 열쇠다. 미래로 향한다.’ 그 문장들을 수첩에 적은 뒤 머릿속에서 반복해 되뇌며 돌길에 발을 뻗어 걷기 시작했다. 돌들이 부딪혀 까끌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왼발이 아래로 쑥 들어갔다가 오른발이 앞으로 경사진 돌을 밟고 위로 올라왔다. 굴곡이 많은 걸음걸이로 계속 걷다 보니 저 앞에 검은색의 형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사람들의 인영이었다.


사람들은 발 밑에 가득 깔린 돌들을 마구 정신없이 치우며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난 그중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가서 무엇을 찾느냐고 물어봤다. 그 사람은 이상한 질문을 들었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것도 모르냐는 듯이 말했다. 열쇠. 미래로 향하는 가장 작고도 날카로운 열쇠를 찾고 있다고 했다. 지금껏 그 열쇠가 있는 돌은 모두 조그맣고 별 볼 일 없는 돌이었다고.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큰 돌을 찾고 있었다. 다른 돌 보다 화려하고 색갈이 고운 돌, 크기가 커다랗고 눈에 띄는 돌. 지금껏 오랜 기간 동안 열쇠를 찾아 헤매었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랬을 것이다. 가장 작은 돌이 변수가 되었지만 언제나 크고 멋진 돌을 찾는 사람들.


가장 작은 것들이 가장 많은 세상의 곤혹함을 보는 이유는 인내함 때문이었다. 가장 낮은 곳을 자처해 높이 올라가지 않고 제자리에 머물며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누군가 걸어갈 때마다 밟히고 성난 발걸음에 차이더라도 모나고 거친 곳을 꾸준히 다듬기만 하며 다시 제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렇게 가만히. 아주 오래.


그리하여 나는 사람들과는 반대로 가장 작고 평범한 돌을 찾기 시작했다. 울퉁불퉁하고 모난 면을 지닌 보통의 돌. 작고 눈에 띄지 않아 숨겨진 돌. 열댓 번 즈음 눈에 보이는 작은 돌들을 들었다가 살피고 내려놓았을까. 난 드디어 열쇠를 찾을 수 있었다. 열쇠를 밑에 깔고 있는 작은 돌은 회색으로 얼룩덜룩 빛나고 있었다. 뒤집어 보니 열쇠를 꽂을 수 있는 작은 틈이 보였다. 그곳에 열쇠를 꽂고 돌리니 돌이 네 방향으로 열리며 안에 있던 접힌 쪽지를 밖으로 튕겨내었다. 그 쪽지를 펴보니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였는데 곧이어 글자들이 저절로 써지기 시작하여 문장을 만들어냈다. 그 쪽지에 적힌 문장은 다음과 같았다. ‘여행은 시작되나 끝나진 않는다. 당신이 밟았던 땅에 남은 발자국마다 이미 의미는 생겨나기 시작했다. 보랏빛 찬란한 성에 도착하기까지 당신이 진흙도 늪도 사막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가장 중요한 건 화려하지 않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곧이어 푸른 물가를 지나게 되었다. 푸른 물가에는 마음껏 움직이며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는 물방울들이 뛰놀고 있었다. 나는 신발을 벗어 옆에 내려놓고 천천히 물가로 걸어갔다. 수백 수천 개의 물방울들이 햇빛을 통과시켜 무지개를 만들고 분수처럼 하늘을 향해 뿜어져 날아올랐다가 하강하면서 파도를 만들어 내 발 앞까지 와서 발톱을 톡톡 두드렸다. 신기하고 반가운 마음에 손을 펴서 물방울들을 어루만지려 했으나 그럴 낌새를 눈치챈 물방울들이 금세 사나워져 얼굴에 물을 픽 뿌리고서는 물가로 돌아가버렸다. 얼떨떨한 기분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기분이 순간 상한 것 같이 거센 움직임을 보이던 물방울들이 물가로 돌아간 뒤 이번에는 잔잔하고 윤슬이 반짝거리는 물결을 만들어내어 수면 위를 둥둥 떠다니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변덕스러움은 물방울들이 지닌  공통점이자 매력인 듯싶었다.


나는 그들을 만지려거나 그들의 움직임에 개입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리려 한 발짝 물러나 손을 들어 내보이고는 그대로 천천히 자리에 앉아 그들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물방울들이 조금씩 내 앞으로 뚝뚝 떨어져 손과 발에 맺히기 시작했다. 물방울들은 재잘거리며 밝게 이야기했다. 호수에서 온 물방울, 바다에서 온 물방울, 강에서 온 물방울, 또는 어항에서 온 물방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골목 사이 구석진 웅덩이에 갇혀 있던 물방울. 그들의 이야기는 다양했고 모두 달랐다. 나는 물방울들의 이야기를 다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있는 그대로 들어주고 물방울들이 튀어 오르는 방향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나에게도 위안이 됨을 알았다. 그들의 투명한 눈을 마주하는 것이 가장 고결한 즐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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