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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희 Aug 07. 2023

보랏빛 성

지도의 끝

나는 예정된 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인 보랏빛 성으로 향했다. 비밀 지도의 가장 위쪽에 점 찍힌 곳이었다. 멀리서 봤을 때 보랏빛 성은 노을에 둘러싸인 것처럼 고요하면서도 불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보다는 저 북극의 오로라를 한 움큼 도려내어 가져다 놓은 듯 영롱하고 반짝거리는 보라색의 구부러진 빛들이 넘실대며 성을 둘러싼 채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성 입구의 커다란 붉은빛 보석들로 휘감긴 문 앞에 서자 내가 올 것을 예상이나 한 듯이 문이 스르르 열렸다.


성 안은 따뜻하고 풍요로웠다. 말을 한 것도 아닌데 필요한 것들이 모두 있었고 바로바로 채워졌다. 그런 의미에서는 아주 상냥한 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성의 모든 층에는 커라란 기둥들이 바닥과 천장을 잇고 있었고 그 기둥들 사이를 금색 줄과 장식구들이 채웠다, 어디를 가든 끊이지 않는 청아하고 은은한 하프 연주 소리가 들렸다. 음식들은 항상 따뜻하고 배불리 먹어도 남았으며 이전에 맛보지 못한 최고의 맛이었다. 체스를 두고 싶다고 생각하면 테이블 위에 체스가 두어져 있었고, 허브 차를 마시고 싶다고 중얼거리면 팔걸이 옆에 따뜻한 찻잔이 놓여 있었다. 그렇기에 심심할 틈이 없었지만, 더욱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낼 수 있던 건 층마다 빼곡하게 채워진 책들이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한 책들. 아름다움과 추함이 뒤섞인 채 사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을 때에 세상을 사랑함은 값지고 아름다운 일이 될 터였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누군가에게 이 보랏빛 성처럼 변할 것이었다. 누구보다 상냥하고 다정하여 따뜻하고 평온한 시간을 내내 누리기를 바라는.


나는 비밀 지도를 발견했을 때부터 시작된 여정을 이제 마무리할 때가 왔음을 깨닫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 ‘오늘’이라는 단어를 입에 붙이는 이상 무언가를 향한 ‘여정’은 끝나는 일이 없겠지만 적어도 발을 뗀 곳에서 지금 발 붙인 보랏빛 성까지의 여행은 끝나가고 있는 셈이었다. 세상에는 즐거움도 많고 가져야 할 것도 많다. 해내야 할 것도 많고 몰랐어도 될 그러나 이름 붙여진 후 모두가 알아야 될 지표가 된 것들도 많다. 더 솔직해진다면 값을 지불해서라도 가지고픈 빛나는 것들과 반짝거리는 것들도 많다. 욕심을 내는 것이 정당하게 느껴지는 것들도 많다. 그건 한 두 개의 보석일 수도 있고 한눈에 보기 힘든 땅 덩어리일 수도 있고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손에 잡히지 않는 영광은 항상 따로 있다. 중요한 이름들로 꽉 차 이름 없는 상태로는 뒤처지고야 마는 세상에서 가만히 이름표를 내려놓는 어리석은 행동처럼 말이다. 무수한 순간에 다정하고 친절하고 싶다. 그래야 내가 삐딱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조차 수많은 순간들 중 하나로 치부하여 넘어갈 수 있을 테니.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랑하고 싶다. 그것만이 나의 지도 가운데 커다란 방점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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