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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희 Jul 20. 2023

설원

아무도 밟을 수 없는 눈의 땅

나는 푸른 숲을 떠나왔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설원이었다. 365일 눈이 녹지 않는 땅. 그곳의 사람들은 눈에서 태어나 눈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매일같이 새롭게 쌓이는 눈을 보며 아침을 맞고 밤을 보낸다고 했다. 푸른 잔디로 덮인 땅을 가로질러 걷다 보면 가파르게 꺾인 절벽 아래로 하얗고 차가운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손에 설원의 마을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쥐고 있었다. 아신이 써준 것이었다. 푸른 숲과 설원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고, 왕래가 있진 않지만 이렇게 편지를 써주는 것만으로도 여행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설원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쌀쌀맞기 마련이라고 하였다.


과연 설원의 입구에 다다라서 경비로 보이는 두 장정이 나를 마을장에게로 데려가는 동안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았고 이방인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한 번씩 훑어보기만 했을 뿐이었다. 마을장은 푸른 눈을 가진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편지를 받아서 읽고서는 딱 두 마디를 말했다. 가하와 아마로. 손님과 환영이라는 뜻이었다. 그 후로는 낯설지만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 닿기 시작했다. 어쩌다가 여행을 오게 되었는지, 푸른 숲을 지나왔는지, 푸른 숲의 사람들은 여전히 곧잘 수마에 빠져드는지, 이외의 땅은 어떤지 등 궁금했던 질문 보따리를 하나씩 풀다가 밤이 새도록 세상 이야기를 하였다.


설원은 정제된 눈을 수출한다고 했다. 눈을 다루는 기술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기에 눈으로 만드는 장식과 조형물, 먹어도 해롭지 않은 눈이 재료에 들어간 음식들처럼 생각보다 다양하고 생소한 상품들도 많았다. 배달 기간 동안 눈이 녹지 않을 보냉 기술도 갖췄기 때문에 가능한 일들이었다. 내리는 눈이 자산이기에 사람들은 밭을 나누듯 설원을 나눠 삐뚤빼뚤 울타리로 그어진 땅을 각자 소유하고 있었다. 평소 눈을 다듬고 상품을 생산해 내는 일들로 작업을 하며 수입을 얻고 시간을 보내지만 요즘은 특히나 분주한 이유가 있다고 했다. 바로 ‘눈의 축제’였다. 이곳의 눈을 하염없이 내리는 존재가 있다고 하였다. 그 존재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웨’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매년 7월 중순 하루에 눈이 오지 않는 날이 생긴다고 한다. 그때에는 대신 하늘에 구름만 끼는데 구름 사이 태양의 빛이 꼭 한 울타리 내의 눈을 비춘다고 한다. 그러면 그 해 눈의 축제 우승자는 그 울타리 안의 땅 주인인 것이다. 단순히 생각하면 어떤 의미가 있나 싶지만, 그로부터 1년 동안 그 울타리 안의 눈은 녹지도 않고 더러워지지도 않는다고 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격이었다.


축제는 그로부터 이틀 후 시작되었다. 빨강, 초록, 주황, 파랑, 보라.. 온갖 색의 조명이 집과 집 사이, 울타리와 울타리 사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은 줄에 매달려 빛을 내었다. 꽃을 든 눈사람, 빵을 품에 가득 든 채 바게트를 먹고 있는 눈사람, 심각한 얼굴로 책을 읽는 눈사람, 눈으로 만든 낮잠 자는 사슴, 눈으로 만든 달리는 말, 눈으로 만든 키 큰 꽃 뒤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놓은 토끼. 수많은 눈사람과 동물 모양 눈 모형이 곳곳에 있었다. 눈으로 만든 우유 빙수, 눈을 넣어 만든 차가운 차, 눈을 뿌려서 굳힌 얼음과자 같이 다양하고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도 집집마다 내놓아 진열하고 있었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노래부터 신나고 경쾌한 캐럴까지 밤낮 쉬지 않고 설원을 가득 채웠다. 차가운 눈의 땅에서 따뜻한 온기 가득한 축제 분위기에 마음도 몸도 녹아내려가고 있었다.


축제를 시작한 지 셋째 날이 되었다. 그날은 아침에 일어나 창 밖을 내다볼 때 이곳 설원에 와서 처음 보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눈이 내리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에는 흐릿하게 구름이 겹겹이 껴서 아침이지만 그리 밝지 않았다. 사람들도 어수선하게 웅성 웅성대며 각자의 울타리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손님을 맞는 빈 집에 머물고 있어서 그런 그들을 어깨에 담요를 두른 채 차를 홀짝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과연 햇빛이 언제 들 것이며 그 빛은 누구의 땅을 비출까? 생각을 하며 집 안으로 들어와 여행 일지를 쓰다가 그새 꾸벅꾸벅 졸았다. 퍼뜩 졸음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니 시계는 정오를 나타내고 있었다. 점심을 차려 먹고 여전히 축제 분위기의 노래들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어 노래를 흥얼거리며 카메라로 그간 찍은 사진들을 돌려보던 와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빛이다!” 깜짝 놀라 얼른 카메라를 바닥에 내려놓고 실외화로 갈아 신고서는 문 밖으로 나섰다. 그 자리에 서서 비키지 않을 것만 같던 구름들이 조금씩 움직여 그 사이 틈을 내어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중앙도 아니었고 가장 넓은 땅이 있는 곳도 아니었으며 온갖 침엽수와 설강화, 눈꽃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이층 집도 아니었다. 빛은 점점 몸집을 불리더니 이내 동쪽으로 그리고 북쪽으로 슬그머니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빛이 땅을 비추었다.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하? “ ”뭐? “ 같은 소리들을 내뱉었다. 그 땅은 가난하고 늙은 노파와 어리고 꾀죄죄한 손녀가 사는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집이 있었다. 의자에 앉은 할머니의 한 손을 꼭 붙잡은 소녀는 다른 한 손에 장미꽃 한 송이를 들고 있었다. 마치 그 장미꽃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아름답고 귀한 선물이라는 듯이. 빛이 땅을 비추는 것을 확신하자 할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소녀의 손에 잡힌 장미꽃에 입맞춤을 하고선 그 손을 하늘로 높게 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설원의 사람들 중 어딘가에 서 있던 사람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짝 짝 짝 … … . 누구도 짓밟을 수 없고 더럽힐 수 없는 땅의 눈이 그들의 것이었다. 빛은 가리어져 있고 숨겨져 있던 땅으로 얼굴을 향했다. 응당 그래야 하듯이. 가장 높은 곳의 태양이 내려와 가장 낮은 땅에 무릎을 대고 입을 맞췄다. 그게 사랑이라는 듯이. 그 빛은 마음에 차고 흘러넘쳐 설원을 충분히 휘감고도 남아 푸른 숲으로 그리고 다른 땅들로 흘러갈 것이었다. 이 장면이 나의 마음에 남아 오래오래 간직되리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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