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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Aug 13. 2024

06. 엄지발가락 들기

시르사아사나 │ 에이스비기너의 저주

  늦은 봄 밤공기에 홀려 차 트렁크에서 6년 만에 스케이트보드를 꺼냈다. 생각보다 금세 예전의 자세가 나왔고, 과신했고, 넘어졌고, 반 깁스를 했다. 여름이 돼서야 깁스를 풀었다. 재활실에 들어서자 물리치료사는 간단한 테스트부터 해보쟀다.


  신발 벗고 바닥에 서세요. 앉으세요. 일어나세요. 한발로 서 보세요. 이번엔 반대로.

  치료사의 지시가 뇌 대신 근육에 직류로 꽂힌 듯 몸은 반사적 출력값을 내보였다.

  “이제, 발바닥 모두 바닥에 붙이고 엄지발가락만 들어보세요.”


  삑-, 몸에서 에러 알람이 울렸다. 왼쪽 엄지발가락에 힘을 주자 옆에 달린 네 개의 발가락이 회식자리 파도타기 원샷마냥 휘리릭 일어나는 게 아닌가! 다친 쪽이라 그런가? 오른쪽 엄지발가락에 힘을 줬다. 이쪽 넷도 속절없이 따라 들렸다. 물리치료사는 발 잘 접질리는 이들이 그렇다며 내전근과 발목에 좋은 스트레칭을 알려줬다. 발바닥에 빨간 고무 밴드를 건 채 갈색 레자 침대에 누워 천장으로 다리를 들어 올렸다. 하나, 둘. 그의 구령에 맞춰 발목 포인, 플렉스를 반복했다. 하지만 정작 되풀이되던 건 발가락 하나 맘대로 못 움직이는 내 몸에 대한 충격과 그러고 보니 신발 뒤축은 늘 바깥쪽만 닳더라는 뜻밖의 깨달음이었다.




  중고등학교 만년 체력장 4등급이던 나도 회사원이 되니 살기 위해 얕지만 꾸준히 운동을 한다. 타고난 운동신경은 없다. 다만, 잘생긴 근질과 까무잡잡한 피부, 무모한 자존심만 있을 뿐. 덕분에 헬스, 복싱, 수영, 서핑, 러닝, 요가까지. 시작한 모든 운동은 첫 달의 유망주다.



  입문만 네 번, 도합 경력4개월의 수영이 그랬다.

  “다들 여기 회원님 보세요.”

  내가 킥 판을 잡고 발차기를 하자 코치는 레인에 흩어져 있던 열 댓 명의 회원을 불러 모았다. 불끈 솟은 앞벅지 근육 발 추진력이 장딴지와 발등을 거쳐 발가락 끝까지 실리자, 누리호 발사체가 분출한 연기처럼 물거품이 수면을 가득 메웠다. 여기서 킥 판 만 놓으면 당장 반대벽으로 날아갈 기세. 하지만 본격 자유형에 들어가자 천정으로 쳐든 오른팔과 고개가 무안할 만큼 오른쪽 귀에 물이 찼고 몸이 가라앉았다.



  한때 강원도에서 매 주말을 보내게 했던 서핑도 다르지 않았다.

  “너 폼 보니 보통 여자애들 하는 로깅(보드 위를 서퍼가 사뿐히 앞뒤로 걷는 기술)보다 퍼포먼스(파도 면의 위아래 곡선을 그리며 훑듯 타는 기술) 보드가 잘 어울리겠다.”

  첫 레슨 저녁 술자리에서 서핑 숍 사장 오빠가 내 라이딩 자세를 재현하며 말했다. 비기너치곤 꽤 파도를 잡던 내가 애제자로 욕심이 난 건지, 보드 하나 팔아 보려는 심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열정적 심야 보충 수업을 이어갔다.

  “여자 퍼포먼스 완전 유니크지!”

  그는 끝내기 홈런 멘트와 함께 맥주 캔 든 손으로 한 쪽 벽을 가리켰다. 손끝을 따라가니 비스듬히 벽에 기댄 ‘아무르타이거’ 퍼포먼스 9.0피트 화이트 서핑보드가 내게 씽긋- 눈짓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카드를 꺼냈고, 테이블에 쌓인 빈 맥주 캔을 한 켠으로 밀어 보드를 올려 미끄럼방지 왁스를 칠했다. 낙장불입. 몇 시간 뒤 일출과 함께 희망으로 입수했다, 절망에 젖어 일몰을 엎고 기어 나왔다. 당최 파도가 잡혀야지! 그나마 몇 번 잡아탄 사진엔 목 돌아 간 레고 인형이 화이트 퍼포먼스 서핑보드 위에 엉거주춤 서 있었다.



  코로나로 실내 운동이 쉽지 않던 3년 전, 친구 제안으로 수요일마다 퇴근 후 잠원지구를 달렸다. 역시 운동은 장비발이다. 애플워치를 사고 30초가, 세계육상연맹이 장비 도핑으로 취급하는 탄소 섬유 플레이트가 장착된 나이키 줌 플라이5를 사 신고 30초가, 총 1분이 한 달 새 단축됐다. 하지만 쿵쿵쿵. 무거운 발소리는 그대로였다. 늘 반바퀴는 앞서던 키 180센티미터 친구가 속도를 늦춰 다가왔다.

  “어깨랑 다리에 힘 빼 봐. 발꿈치 말고 발바닥 중간부터 바닥에.”    

  300미터 정도 발을 맞춰 주던 그는 가망이 없어 보였는지 고개를 몇 번 갸웃하고 “계속 그렇게 하면 돼.”하곤 저 앞으로 달려나갔다. 구한말 호외를 날리는 열댓 살 소년처럼 가볍게 통통통.




  에이스 비기너의 저주. 이 비밀의 실마리는 깁스를 푼 해 가을, 새로 등록한 동네 요가원에 있었다. 포니테일로 묶은 히피 펌에 룰루레몬 화이트 브라탑과 카키색 레깅스를 입은 단단한 몸의 여자가 원장실에서 나왔다. 나보다 두세 살은 어려 보였는데 눈빛과 화법이 통달한 요기 그 자체라 상담이 끝날쯤엔 ‘원장님’이 아니라 ‘내일 봬요, 언니’ 라 할 뻔했다.


  예상대로 그녀 수업은 제대로 고됐다. 머리카락까지 땀에 푹 젖어 휘청거리며 수련실을 나오는 내게 그녀가 말했다.

“꾸준히 하시면 효과 많이 보실 스타일이예요.”

  아, 클리셰! 입문 한정 유망주에게 그런 말은 충분히 익숙했다. 원장님이라 신규 회원 관리하시나? 나도 적당한 표정과 함께 “열심히 할께요.”하고 집에 가려는데,

  “일하실 때 엄청 열정적이죠? 잠잘 때도 몸에 힘 들어가 있고.”

  여기 요가원 아니고 점집인가요? 출입구로 향하던 발이 그녀가 있는 카운터로 돌아섰다.

  “열정적인 거 좋죠. 하지만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만큼, 원치 않는 방향으로 힘을 많이 들일 수도 있어요. 정작 필요할 땐 놓치고요. 힘을 빼고 채우는 걸 익혀가세요. 몸과 마음이 훨씬 좋아질 거예요.”

  옴짝, 나의 왼쪽 엄지발가락이 반응했다.




  그녀의 주문 같은 격려 때문이었을까? 잦은 야근에도 주 3일은 요가원에 갔다. 지난 요가원에선 엄두도 못 낸 자세들이 될 때마다 에이스 비기너의 저주도 끝이 보이는 듯했다. 그래도 머리서기만큼은 제자리. 깍지 낀 손날을 바닥에 대고 손바닥에 정수리를 얹는다. 천정으로 치켜든 엉덩이를 유지하며 발을 얼굴 쪽으로 총총총. 어느 순간 발이 가벼워진다. 자연스럽게 들리는 다리. 몸을 일직선으로 세우면 완성! 말로 쓰면 쉽다. 옆 사람만 봐도 쉽다. 하지만 나는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안간힘 쓰다 앞구르기만 여러 번. 산발이 된 채 뻘쭘히 매트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하루는 낑낑대는 내 등에 선생님이 무릎을 대고 섰다. 그리고 반동으로 차올린 발목을 잡아 세웠다. 찰나로 거꾸로 섰다, 이내 떨어졌다.

  “선생님, 제 코어가 약한가요? 아님 등? 어깬가?”

  그녀는 찬찬히 내 몸을 훑더니

  “아뇨, 힘은 충분해요. 다만 겨를이 없으세요.”

  겨를이라니? 힘도, 자세도 아니고 웬 겨를? 그러고 보니 다운도그(기지개 펴는 강아지를 닮은 기본 자세)를 할 때 손바닥 온 면으로 바닥을 착 잘 밀고 있다 내심 뿌듯할 때마다 선생님의 손 끝이 어깨를 가볍게 터치했다. 그리고 나지막이.

  “힘 빼고.”

  입문반 유망주의 축복은 온몸 꽉 찬 힘. 저주를 끝낼 열쇠는 그것을 빼는 것이었다.




  아침 7시, AI시계가 구글 캘린더 속 일정을 읊어준다. 이상한 쪽으로 부지런하기만한 프로젝트 매니저와 미팅이 오늘이라니. 뜨던 눈을 질끈 감는다. 역시나 그녀는 행사장 규모를 논하는 자리에서 리셉션에 무슨 볼펜을 놓을지로만 20분을 떠들었다. 나는 그녀 말 끝을 인터셉트하기 바빴다. 이마 근육이 눈썹을 한껏 당겨 올렸다. 키보드에 닿은 손 끝엔 힘이 실렸고 팔꿈치는 횡격막까지 닿을 듯 몸통을 짓눌렀다. 어깨는 한껏 날 서 있었다. 어휴, 진 빠져.



  퇴근 후 켠 TV에서 데뷔는 했지만 인기는 얻지 못한 남자 아이돌을 리부트하는 서바이벌 쇼가 나왔다. 실패 속에 살고 있는 소년들은 현실을 벗어나려 춤추고 노래했다. 나는 막냇동생 보는 누나의 마음(난 사실 막내딸이다)으로 리모컨을 손에 쥔 채 집중했다. 그때 한 소년이 있는 힘껏 목을 긁어가며 노래했다. 나도 모르게 움찔, 마이너스 볼륨 버튼을 눌렀다. 그 친구가 GD, 전소연 같은 팀 프로듀서라는데, 어떡하냐 쟤네들.

공연이 끝나자 심사위원인 송민호가 마이크를 들었다.

  “물론 저도 그런 과정을 겪어서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지금 힘이 너무 들어갔어요. 힘 빼는 연습을 해야 해요. 더 세련된 스타일을 찾을 겁니다.”

  쟤 걱정을 할 때가 아니네? 회사에서 내 모습이 스쳤다. 우린 왜 그리 힘을 꽉 줬을까? 간절함이라기엔 난 아니고, 짜증이라기엔 소년에게 안 맞다. 유일한 공통 감정은, 겁이었다.



  겁이 나는 만큼 힘이 들어갔다. 마지막 무대일지 모른단 소년의 겁. 물에 빠질까 넘어질까, 초보의 겁. 일이 멍청하게 돌아갈까, 제대로 인정받지 못 할까, 직장인의 겁. 대형견에게 혼자 캉캉 짖어 대는 몰티즈처럼. 그럼 내가 강한 줄 알았다.




  요가 선생님을 따라 해먹에 골반을 걸치고 해까닥 몸을 뒤집었다. 플라잉요가는 처음이라 개구리 다리로 매달린 시작만 기억할 뿐, 따라가기 급급해 당장 내 자세는 가늠도 안됐다.

  “안 떨어져요. 자, 힘 빼고 자신을 믿어보세요.”

  일단 나보다 선생님 말을 믿고 겁을 비워 봤다. 척추 사이사이가 느슨해졌다. 머리를 꽝 찧을 것 같았는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편안해진 허리와 골반에 힘이 차올랐다. 힘을 주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



  근육의 힘과 연골 사이 공간감, 자연스러운 무게 중심 이동을 처음 느꼈다. 초등학교때 문방구에서 산 과학 키트의 설명서대로 연결한 꼬마전구에 불이 탁 켜진 순간처럼 들떴다. 이 기세라면 애증의 머리서기도 되겠다! 땀에 젖은 요가복 그대로 입은 채 집에 돌아와 매트를 꺼냈다. 늘 두던 벽 앞이 아닌 거실 중앙에 펼쳤다. 무릎을 꿇고 손깍지를 바닥에 뒀다. 자세 못지 않게 마음에 집중하고 호흡!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몸 됐다, 이제. 넘어질 리 없다. 넘어져도 별 일 없다.’


  바닥에 박은 머리 앞으로 발끝을 당겨 온다. 엉덩이가 솟고 견갑골과 팔꿈치에 힘이 찬다. 정수리와 발끝은 그만큼 가벼워진다. 오른 다리만 먼저 위로, 왼다리가 더 수월하게 들린다. 오! 진짜 되겠다! 이제 나도 한다! 된다! 다다다다다! 쿵! 먼저 뻗었던 오른다리가 천장에 머물지 못하고 포물선을 그리며 넘어가버렸다. 제대로 등치기. 아, 시바 신(힌두교 최고 신)이여, 저는 아직 멀었나요?


  강제 사바사나(大자로 누워 몸과 마음을 다독이는 수련 마지막 자세, 직역하면 송장자세)에 잠시 머물렀다 일어났다. 요가매트를 돌돌 말아 방으로 가져가다 문뜩, 엄지발가락만 한 번 들어볼까? 힘을 빼고 엄지발가락만 의식하며 아래를 봤다. 양 엄지발가락이 내게 선명한 쌍따봉을 날려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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