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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ul 02. 2024

04. 적절한 거리

타다아사나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하는 70세 이상 뇌 인지 검사에 아빠가 참여하게 됐다. 1~2주 간격으로 세네 번은 서울로 와야 한다고 엄마를 통해 아빠에게 전했다. 뭐든 간에 "고마 됐다."부터 해버리는 아빠는 이번에도 그랬다가 까칠한 막내딸, 내 전화 한 통에 결국 하시게 됐다.


  그래놓고 내가 걱정이었다. 엄마와는 퇴근길 매일 짧은 통화를 하고, 한두 달에 이삼일은 같이 시간을 보내지만, 아빠와 단 둘이 있던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타박 전화도 일 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한 통화 중 하나였으니까.


  첫 검사 날 아빠를 마중하러 서울역에 내리자 섭씨 35도의 더위, 경찰과 실랑이 중인 노숙자 무리, 종교 집단의 집회 소음이 온 신경을 짜증스럽게 움켜쥐었다. 얼른 에어컨 바람 가득할 역사로 발길을 재촉하며 의식적으로 다짐했다. 오늘 하루는 무심결에도 쏘아 대지 않기로. 먼저 다정하게 이야깃거리를 꺼내기로.


  아빠가 탄 기차는 병원 예약 두 시간 전, 점심쯤에 도착했다. 역사에 연결된 쇼핑몰은 최근 리뉴얼을 했는지 세련된 인테리어의 유명 맛집으로 가득했다. 푸드코트 두 바퀴를 돌고서야 발견한 <백년옥>에서 아빠가 먹고 싶다던 시원한 콩국수 두 그릇을 시켜 구 서울역사가 보이는 창가에 나란히 앉았다. 점심을 먹고는 커피도 한 잔 할 겸, 엄마가 좋아하는 생도나스도 아빠 편에 보낼 겸 <태극당>에 갔다. 밥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 작년 말 다녀온 키르기스스탄 여행을 묻는 아빠에게 사진도 영상도 다 보여 드렸는데 한 시간이 넘게 남았다. 평소 별 대화가 없던 아빠와 관계를 간과하고 너무 여유 있게 시간을 잡은 탓이었다. 어디라도 구경하고 싶어하는 아빠 눈치에 폭염 속 덕수궁 한 바퀴를 돌고 병원으로 갔다.


  검사는 첫날이라 간단하게 세 시간 정도 걸렸다. 끝나기를 기다리며 보호자 소파에서 몇 달째 고민하던 진공 밀폐용기 풀 세트를 질렀다. 아빠와 단 둘이 반나절은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충동 소비를 자극할 만 하긴 했나 보다.


  검사실에서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아빠가 나왔다. 내가 "검사 어땠어? 할 만했어?" 하자, 아빠는 손짓까지 섞어가며 경험한 모든 것을 설명해주려 했다. 그리고 "그래도 잘하는 편이라던데." 순간 아빠에게서 첫 등교를 잘 마치고 뿌듯하게 집으로 돌아와 이것저것 자랑하는 어린아이가 보였다.


  이 주 뒤 두 번째 검사는 뇌 MRI였다. 급하게 건네받은 틀니를 가방에 넣다 말고, 최근 고향 지인들의 소식이 생각났다. 갑자기 큰 병 얻으신 부모님을 서울 대학 병원에 모시고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지쳤다는 속상한 이야기들. 우리 아빠도 작년 쓸개 수술 이후 많이 좋아지신 덕에 치료가 아닌 검사로 던전같은 병원을 서울 나들이 겸 오시는 게 참, 이기적이게도 감사했다.


  검진이 끝나고 서울역 근처 물회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소주를 한 잔씩 따르고, 국자 가득 문어를 퍼 아빠 앞접시에 덜어 드렸다.

"아빠는 해산물 중에 뭐 젤 좋아해? 문어 좋아하지?"

엄마가 말해줬던 적이 있었다.

"어, 문어 좋고, 멍게도 제일 좋아하지. 특히 돌멍게, 비려서 못 먹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좋아한다."

  처음 알았다. 아빠가 멍게를 좋아한다는 것을. 그리고 놀랐다. 내가 아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과 실은 나도 해산물 중에 멍게, 멍게 중에 (껍데기에 소주 담은) 돌멍게를 가장 좋아하는 사실에.

  금새 빈 아빠 그릇을 끌어 당겨 국물에 푹 담갔던 국자에 멍게를 골라 담았다.




  마침 그날 남자친구는 미국으로 출국했다. 고작 일주일 출장인데 열여섯 시간 시차 탓에 떠나기도 전부터

마음에 빗금이 두 도시 간 경도처럼 촘촘히 그어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막상 제한된 동기화 시간이 오히려 생경한 안정감을 줬다. 털실을 타고 종이컵 전화기를 가득 채운 목소리처럼 더 따뜻한 밀도로 오롯하게 존재했다.


  성숙해진다는 건 거리에 대한 마음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것 같기도 하다. 멀어지고 가까워지는데 미안하기도, 두렵기도, 속상하기도, 마냥 좋기도 한 감정을 솔직하게 마주하는 것. 그러다 나를 세워 둘 적절한 원근을 알아가며 조금씩 철이 드는 것 같다. 웃자라기만한 내가 디딘 자리를 잠시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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