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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Jun 06. 2024

03. 망개떡 보자기

우르드바다누라아사나

  제22대 총선이 이틀 지난 금요일. 매너 없는 유세 트럭에서 틀어 재끼던 개사한 유행가 대신 ‘성원에 보답하겠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빨갛고 파란 현수막이 로터리의 원래 주인인 마냥 점령하고 있었다. 며칠 만에 바뀐 도로의 인상이 영화적이다 싶다가, 개표 결과가 나오자마자 미리 인쇄해 둔 현수막 중 하나를 급히 실어 새벽 큰길마다 달았을 업체의 밤이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떠올라 괜히 내가 다 피곤해졌다. 마침 들어온 좌회전 신호에 핸들을 꺾고 대시보드 시계를 봤다. 아침 아홉 시 이십오 분, 아직 수업 시간까지 넉넉했다.


  스케줄 근무를 하느라 일주일에 하루는 평일에 쉰다. 그리고 그날은 오전 수련을 간다. 내 또래 퇴근한 직장인이 대부분인 저녁시간과 달리 오전 수업은 사오십대 아주머니들의 사랑방 같다. 원장님도 '우리 요가원 부녀회장님'이라고 부르는 50대 후반의 아담하고 통통한, 어깨 길이 파마머리 아주머니를 센터로 각자 암묵적인 지정석에 자리한다. 수업 전까지 혼자 조용히 몸을 풀거나, 휴대전화를 만지작 거리는 저녁반 회원들과 달리 오전 수업 어머니들은 요즘 해 먹을 거 없다는 고민에 나는 어제저녁으로 묵은지 돼지찜을 해 먹었다던지, 이 앞에 새로 생긴 브런치 카페가 괜찮다든지, 어제 남편과 골프 연습까지 가고 보니 하루종일 운동만 했다는 일상을 '만두카'나 '라이폼' 매트 위에서 나눈다. 나름 신도시에서도 부촌다운 아주머니들의 여유 있는 대화를 피해 나는 창가 옆 첫 줄 구석에 나의 '가네샤' 매트를 깔고 앉았다. 맞댄 양 발바닥을 두 손으로 끌어 잡아 허리를 곧추 세우고 살짝 들리는 무릎을 지그시 눌렀다. 그때 전면 거울로 뒷 줄에 매트를 펴는 한 회원이 보였다. 내가 조금 가리는 것 같아 자리를 창가 쪽으로 약간 옮기며 보니 새로 온 지 몇 달 안 됐지만 외모가 인상적이라 기억하던 분이었다. 그녀의 나이는 60세 언저리일 것 같았은데, 170센티미터는 넘는 늘씬한 키, 나잇살에도 불구하고도 홀쭉한 배에 스님바지 핏의 요즘 요가복 스타일까지 입어서 눈길이 가던 분이었다. 왠지 왕년에 배우나 광고모델을 잠깐이라도 했을 것 같은 아우라의 소유자.


  수업 시작 3분 전, 원장님 수업이 아니었는데 그가 웃으며 들어왔다. 그리고 뒷자리 그녀의 양 어깨를 잡아 일으켜 선생님 매트까지 돌진했다. 하지 말라며 손사래 치는 그녀를 매트 중앙에 세우고 "빨리 인사해요!" 하자 다른 회원들도 함께 손뼉 치며 "그래! 그래! 인사해야지!"하고 거들었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는 오전반 이방인인 나는 일단 선량한 미소만 따라 지었다. 그러다 불현듯 '아, 저분 남편이 이번 총선에 당선되셨나?' 하는 합리적 추론이 떠올랐다. 그래, 이 동네 사모님 바이브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그런데 잠깐. 그런 걸 이렇게 사적인 공간에서 공식적인 자리로 마련해서 인사시키다니, 원장님 좀 실망인데? 싶었을 때, 그녀가 입을 가린 손을 내려 가슴 앞에 깍지를 낀 채 수줍게 말했다.


  "아우~ 정말! 아니 다들 하시는 건데. 제 평생소원이던 우르드바 다누라 아사나를 드디어 지난주에 혼자 힘으로 성공했어요. 다 원장님과 선생님, 그리고 같이 수업 때 도와주신 여러분 덕이예요. 부끄럽지만 그래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떡을 좀 해왔어요. 조금씩 싸가실 수 있게 작은 봉투도 가져왔으니까 수업 끝나시고 꼭 챙겨가주세요. 원장님과 선생님께는 약속대로 곧 오마카세 쏘겠습니다! 아휴, 정말! 부끄럽게 이런 걸 시켜~"


  라운지 테이블에 놓여 있던 007 가방 만한 황금색 보자기가 그 떡이었나 보다. 초등학교 때 학년이 끝날 쯤 반장 엄마가 보내온 책거리 떡, 신혼여행 다녀온 회사 동료의 답례 떡, 실적이 개선된 거래 업체의 감사 떡은 먹어봤어도, 아사나 성공 기념 떡이라니! 하긴 가르침을 향한 고마움, 축하에 대한 보답, 기여를 생각한 인사라는 떡의 속성을 생각해 보면, 그녀의 아이템 선정은 찰떡같은 메타포였다.
  처음으로 손 등에 올린 공기 다섯 알을 한 번에 꺾어 낚아챈 소녀의 표정처럼 봉긋 광대가 올라간 그녀를 보니 나도 팡파르 같은 웃음이 쇄골 사이에서부터 터졌다. 마침 며칠 전 그녀의 우르드바 다누라 아사나 연습 짝이 되었던 탓도 컸다. 양 날개뼈를 받쳐주는 내 손에 기대지 않으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부들거리는 팔, 불규칙적으로 수축 팽창하던 배. 그걸 보며 나도 모르게 함께 숨을 꾹 참으며 카운팅 한 여덟 박자. 콩 하고 떨어진 그녀의 정수리.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는 모습에 손 끝으로 조용히 쳐드린 박수가 생각났다.


  한 시간 후 수련실 밖으로 쏟아져 나온 회원들은 라운지 테이블에 동그랗게 모여 떡을 나눠 담았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기도 했고, 그러기도 민망해 조용히 집에 가려는데 '요가원 부녀회장님'과 그녀가 불러서는 어느새 내 한 손에 소분용 비닐 하나를 쥐어 주셨다. 찹쌀 망개떡, 쑥 망개떡, 쑥굴레 떡을 하나씩 담았다. 풍성하던 떡 상자는 금세 텅 비었고, 다들 손바닥 만한 떡 봉지 하나씩 손목에 끼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집에 돌아가는 길 신호를 기다리다, 주섬 주섬 떡 하나를 꺼내 베어 물었다. 예쁘게 빚어진 응원과 따끈하게 쪄진 감사의 맛이 아주 달고 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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