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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May 21. 2024

02. 요가 PTSD

바카아사나


운전 2년 차에 사고내기 쉽다고들 한다. 이제 좀 할 것 같거든. 운동도 그때쯤 방심하게 된다. 나 역시 그 표본에 여부없이 포함됐다.


압구정 사무실 바로 길 건너 요가원을 친한 회사 동기 둘과 다닐 때였다. 하나보다 둘, 둘보다 셋이 낫다고, 확실히 혼자 등록했을 때 보다 일주일에 하루는 더 나갔다. 우린 매일 퇴근 30분 전부터 메신저로 서로 칼퇴 여부를 묻고 곧 요가원 입구에서 만났다. 때론 밥 대신 점심 수련을 함께 하고 회사 1층 베이커리에서 샌드위치를 사 들고 올라오기도 했다. 수련실 우리 자리는 늘 첫 줄 가장 왼쪽부터 하나, 둘, 셋. 선생님 앞을 선호하는 나와 주목을 거부하는 L의 절충 구역에 나란히 매트를 펴고 좌우로 몸을 비틀 때마다 나는 그녀들을 은근 의식했다. 누구와도 비교 말고 매트 안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만국 공통 요가 선생님들의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나는 경쟁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룩한 대한민국 국민답게 S의 유연성과 L의 평정심을 부러워하며 더 늘리고 꺾었다. 정작 그녀들은 몰랐을 것이다. 나의 선량한 빅시스터가 되어줬다는 것을.

‘엎드려뻗쳐’를 닮은 ‘다운도그’에서 한 번에 뒷 발을 양손 사이로 처음 가져온 날이었다. 전 날까지만 해도 10센티미터는 모자라게 떨어진 발을 앞으로 꼼지락 대며 상체를 일으키느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첫 판에 잡힌 애처럼 뒤뚱댔는데, 그날은 진짜 스파르타처럼 용맹하게 ‘전사 자세 1’을 완성했다. 둥글게 열린 날개뼈, 단단히 힘이 찬 코어와 어깨, 문어 빨판처럼 바닥에 착 붙은 열 손가락 끝의 또렷한 감각을 되새김질하자 자신감이 용트림처럼 올라왔다.


“이제, 뒤에서 모두 요가 블록 두 개씩 챙겨 오실게요.”

수업이 10분쯤 남았을 때 선생님이 이번 달 도전 자세라며 ‘바카아사나 (까마귀 자세)’ 시범을 보였다. 매트 삼분의 일 지점에 블록 하나를 가장 낮게 두고 그 위에 쪼그려 앉았다. 그대로 어깨 아래 일직선으로 팔을 떨어뜨려 바닥을 짚고는, 양손과 삼각형 구도가 되는 곳에 다른 블록 하나를 조금 높게 돌려세웠다. 양 무릎을 각 팔뚝에 얹고 팔을 90도 각도로 굽히며 시선과 상체를 앞으로 밀듯이 내려갔다. 이마는 앞에 둔 요가 블록에 닿을락 말락. 엉덩이는 하늘을 향했고 발레리나처럼 쪽 뻗은 발끝이 그에 가까워졌다. 앞 허벅지와 배는 플립폰처럼 꽉 붙었다. 나뭇가지에 앉아 먹이를 향해 막 활강하려는 까마귀 (바카)! 이름 그대로였다.


갓 임명된 전사는 치기 어린 자신감으로 일단 블록에 올라갔다. 

“생각보다 훨씬 앞으로 가야 해요. 그래도 넘어지지 않아요.”

아.. 아뇨, 선생님. 얼굴 쳐 박힐 것 같은데요. 무릎도 팔뚝 살과 뼈 사이를 방황했다. 곧 고꾸라질 것 같은 두려움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오려 할 때, 선생님이 어깨 앞 쪽을 가볍게 잡아끌었다. 그러자 손바닥, 팔꿈치, 어깨에 어름사니가 꼿꼿이 선 것처럼 무게중심이 맞춰졌다! 이건가? 나도 이제 인스타그램에서나 보던 고난도 자세 하나는 할 수 있게 되는 건가? 요가 정신에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 솟구쳤다.

다음 날부터 친구들 출석과 무관하게 요가원에 갔다. 일이 많은 날엔 저녁 수업을 듣고 돌아와 야근을 이어갔다. 자기 전에도 한두 번씩 까마귀가 되는 연습을 했다. 어떤 날은 감도 안 왔고, 또 어떤 날은 옴짝 발이 들렸다. 그러다 회식을 하고 늦게 돌아온 밤. 수업을 못 간 죄책감과 적당한 취기가 부른 자신감이 자려고 누운 몸을 일으켰다. 역시 술은 영어도 술술 나오는 게 하더니 몸도 가볍고 유연하게 해준다 싶었다. 오늘 밤엔 무조건 성공이다! 하는 찰나, 그대로 안경 쓴 얼굴을 처박았다. 안경다리가 부러졌고 왼쪽 렌즈도 튕겨 나갔다. 콧등에 작은 상처도 남았다. 이게 요가 수련인지 술주정인지 헷갈리는 참사와 함께 바카아사나는 트라우마 아사나로 남았다.


지금 요가원을 다닌 지 반년이 될 때쯤 원장님이 요가 블록을 두 개 가져왔다. PTSD의 트리거. 곧 잘 따라가던 꿈나무의 새싹이 다시 말려 들어가려는데 원장님이 불렀다. 

“여기 아름 씨는 아마 한 번도 안 해봤을 거야. 그래도 알려주는 대로만 하면 모두 다 할 수 있어요. 아름 씨, 여기 블록 위에서 쪼그려 앉아봐요.”

하필 초심자 대표 시범 모델이 돼버렸다. 마음이 몸을 꽉 움켜쥐는 바람에 ‘시범’, ‘모델’이란 말이 무안하게 삐그덕 대자, 원장님이 말했다.

“나 앞에 있어, 그냥 믿고 내가 말하는 대로 몸을 써봐요. 고개 들고! 어깨 더 위로 밀어 올리고, 그렇지! 배에 힘!”

그리고 2초 성공. 응? 몇 년 전 한 달 가까이 용을 써도 안되던 자세가 갑자기 되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수련 시간은 비슷한데 말이다. 그러나 알 것 같았을 때, 될 것 같았을 때 든 마음은 달랐다. 꽉 찬 정복 의지는 텅 비고 ‘되는 걸 보니 안 될 수도 있는 거지’라는 생각에 불현듯 자유로움을 느꼈다. 마음의 공백에 새로운 자세도 쉬이 들어와 넉넉하게 자리 잡았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자 두 손바닥만으로 몸을 띄우고 10초를 버텼다.


월(月)과 함께 도전 자세도 핸드 스탠드로 바뀌었다. 모처럼 오전 수업을 갔더니 요가원 오픈 때부터 다녔다는 아주머니 회원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수련실을 릴레이 풍차 돌리기로 횡단했고, 나는 갓 태어난 송아지 걸음마처럼 발을 차 올리다 등짝 그대로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데면데면하던 이모 엄마뻘 회원들이 우르르 달려와 등, 어깨, 허리를 쓰다듬었고, 그 손길은 대기실, 탈의실, 엘리베이터까지 이어졌다. 오장육부가 대지진을 일으킬 만큼 아프긴 진짜 아팠다. 속이 간질 했는데, 부끄러움은 아니었다. 설레는 일렁임에 가까웠다. 이것도 뭐 언젠간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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