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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나름 Apr 23. 2024

01. 목에 다리는 못 걸지만

에카파다시르사아사나 │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요가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200일 된 아기가 있는 친한 언니네에 갔다. 남의 애는 빨리도 큰다더니, 바운서에 누워 목도 못 가누던 갓난아기가 실리콘 스푼을 쥐고 자기주도 식사라는 걸 하고 있었다. 정량으로 차린 이유식이 반은 아기 입으로, 반은 폭죽처럼 사방에 튀는 걸 보며 언니는 요즘 육아가 할 만 한지, 나는 지난 소개팅이 또 어떻게 망했는지를 쏟아냈다. 식탁에 흘린 음식물이 촉감놀이 장난감이 되려 하자 언니는 아기 입과 손을 닦이고, 턱받이와 식기를 걷어 싱크대로 갔다. 나는 아기를 들어 안고 거실을 둥가 둥가 맴돌았다.


  “바닥에 앉혀도 돼. 재원아, 이모랑 놀고 있어.” 

  “언니, 얘 이제 혼자 앉아요?”


  부엌 정리를 하던 언니가 손을 훔치고 휴대전화를 들고 왔다. 컴컴한 아기방 침대 펜스에 이마를 대고 앉아 자는 조그만 몸이 홈캠 화면으로 캡처돼 있었다.


  “이것 봐. 얘도 앉는 게 재밌나 봐. 처음 앉기 시작하곤 새벽마다 이렇게 잤어.”


  전날 밤 나 같았다. 저녁 여덟 시 요가 수업에서 엘보우 스탠드로 처음 2초 (실은 1.7초? 1.5초?) 머물고 제대로 도파민이 폭발했다. 집에 오자마자 거실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소파 쿠션에 휴대전화를 기대 동영상까지 찍어가며 낑낑 복습했다. 딱 두 번, 겨우 1초씩 성공하고 봤더니 밤 열한 시 이십팔 분. 늦게까지 몸을 움직인 탓인지, ‘내가 감히 이걸 하다니’란 감격 덕인지 심장이 쿵쾅대 잠을 설쳤다. 인도 구루, 파탄잘리가 ‘요가는 마음의 작용을 멈추는 것’이랬는데, 이렇게 잠 못 들게 들뜨는 걸 보면 내가 요가를 한 게 맞나 싶었다. 그래도 재원아, 이모는 네 맘 다 안다. 물레에 툭 던져진 흙 반죽 덩어리 같던 몸이 관절과 근육부터 낯설게 빚어지는 기분! RGB 잉크젯 프린트가 백지를 횡단하며 풀 컬러 사진을 출력하듯, 늦잠에서 깬 감각이 무뎌진 몸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느낌! 그것만큼 신기하고 짜릿한 게 없지? 너도 이모처럼 하찮지만 격렬한 성장을 하고 있구나!



  재작년말 회사 발령으로 서울을 떠났다. 쾌청한 날은 실미도도 보이는 신도시로 강제 이주였다. 여기선 평일 저녁에 만날 사람도, 비교적 만만한 업무로 야근도 없었다. “퇴근하고 뭐하냐, 어서 골프 배워야지”하는 남초 조직의 독촉에 매번 바쁘다 하고 저녁 일곱 시 땡 하면 요가원에 갔다. 조금 게으름 피우면 주 4일, 아니면 주 5일이었다. 학창시절 만년 체력장 4등급이던 내가 입사 일 년 만에 살려고 시작한 첫 운동이 요가였으니 연차로 치면 14년차긴 하다. 하지만 조직 이동 네 번, 이사 다섯 번으로 요가원 방랑기도 잦았고, 계획성과 끈기대신 추진력과 단기 몰입만 잘해 헬스, 러닝, 서핑, 복싱, 테니스, 수영으로 운동 바람기도 많았고, 장기 등록일수록 할인 혜택이 크단 말에 일시불로 연간 회원권을 끊고는 카드 값 청구도 전에 빼는 먹는 날이 더 많았던 호갱기도 있었으니, 제대로 된 요가 수련은 작년 한 해가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지난 14년간 요가를 내 평생 반려 운동이라 말하고 다녔다. 눈에 띄게 살이 빠지거나 자세 교정 효과를 본 건 아니었지만, 삐딱한 몸을 알아차리게 한 건 요가가 유일했다. 며칠 연달아 수업을 들은 주엔 습관처럼 꼬던 다리가 어색해 가지런히 뒀고, 문뜩 윗등이 무겁게 느껴지면 모니터에 바짝 마중나간 턱을 당기고 양 날개뼈를 밖으로 돌려 모아 치솟은 어깨를 끌어내렸다. 


  몸의 정렬이 의식되니 틀어진 마음도 보였다. 신도시 발령 이삼 년 전부터 회사에서 나는 시들어갔다. 팀장은 멍청하고 부지런한데 심지어 비겁했고, 업무량은 매일 새벽 퇴근으로도 감당 안될 만큼 버거웠다. 끊임없는 전화와 줄기차게 발광하는 사내 메신저에 사려 깊고 위트 있는 비즈니스 스몰 토크 따위 가미할 여력은 없었고 ‘보내 드린 메일에 다 적어 뒀습니다. 안 보셨나요? 저번에 안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하며 <올드보이> 최민식이 장도리 휘두르듯 대꾸했다. 정작 흠씬 두드려 맞고 있던 건 수화기와 모니터 너머 내 평판이라는 것을 뜬금없이 찾아와 ‘밥 먹자’, ‘술 먹자’ 하던 선후배동료 덕에 알았다. 


  그쯤이었다. 원래 퇴근시간은 지났지만 그래도 일찍 마친 날이었다. 회사 길 바로 건너, 밤 9시에 시작하는 마지막 타임 요가 수업은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몇 달 만에 갔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선생님의 여덟 박자에 맞춰 숨을 쉬었을 뿐인데, 횡경막이 기도까지 솟구쳤는지 목구멍에 울컥 공기주먹이 걸리고 눈물이 흘렀다. 기워 붙여도 네 시간도 못 자던 매일 밤. 잠의 조각들 사이사이를 헤집어 놓던 팀장 얼굴과 업무 압박. 까만 방이 희끄무레할 때까지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던 나. 그 텅 빈 동공 그대로 2호선 출근길에 내몰렸던 나날이 떠올랐다. 서러웠지만 처량하진 않았다. 따뜻한 물에 푹 적셨다 꾹 짜낸 무거운 타월이 내 몸을 덮어주는 것 같았다. 그때야 알았다. 나는 내게도 친절하지 못했다는 것을.


  그래서 신도시 발령이 나자 부동산 임장보다 요가원 상담부터 다녔다. 서울에서 다니던 요가원장님 추천으로 간 곳은 새벽 여섯 시, 90분 수련이라 한 달하고 그만뒀고, 네이버와 인스타그램을 뒤져 지금 여기, 아크로 요가원에 정착한 지 1 년. 균일한 호흡으로 움직이는 ‘빈야사’, 몇 분 간 한 동작에 머물며 섬세하게 몸을 알아차리는 ‘하타’, 정해진 여덟 가지 시퀀스를 수행하는 ‘아쉬탕가’만 해 본 내게 ‘아크로’는 그냥 ‘2PM’만 떠오르는, ‘수련’보단 말 그대로 ‘곡예’와 ‘재주넘기’에 가까웠다. (박재범이 ‘2PM’ 멤버였는지 모르는 시대가 왔으니 TMI를 덧붙이자면, ‘2PM’은 멤버 일곱 명이 단체로 덤블링으로 무대에 등장하던 아크로바틱 댄스 퍼포먼스 그룹이었다.) 신비한 산스크리트어 이름도 아니니 정통과도 멀어 보였다. 운동의 깊이도 얕겠지. 그래서 신도시에 몇 없는 요가원 후보 중에서도 가장 후순위로 뒀다. 하지만 상담하러 온 방문객에게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려 안기는 원장님의 다섯 마리 강아지에 홀려 나는 그 자리에서 3개월을 등록했고 거의 매일 나갔다. 월화수목금토 늘리고 접고 꺾고 비틀다 보니 14년차 나일론 수련자의 밑천이 자각됐다. 내가 뭐라고 어떤 수련이 진짜고 가짜라 오만하게 정의했을까? 아사나(자세)를 향한 몸, 마음, 태도의 접근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니, 그동안 요가에 대해 가졌던 생각이 단정하게 개어져 서랍에 들어갔다. 수련실 바닥 타일끼리 맞닿는 선에 맞춰 매트 끝을 가지런히 놓고 도로록, 매트와 초심자의 마음을 펼쳤다. 앞으로의 수련이 무궁한 가능성을 품은 태초의 영역같이 느껴졌다.


  이러면 꼭 다들 묻는다. 


  “그럼 물구나무설 수 있어? 허리 숙이면 손 어디까지 닿아? 목에 다리 막 걸고 해?”


  일상에 수련이 깊게 들어온 만큼 어깨와 척추에 힘이 차올랐고, 생각이 유연해진 만큼 고관절의 가동 범위도 넓어졌다. 머리서기는 몇 년 동안 목에 담만 유발하는 애증의 아사나였는데, 여기선 한 달 만에 갑자기 1분을 서게 됐다. 이제 허리를 굽히면 손바닥은 온전히 바닥을 짚고, 코도 무릎에 닿을락 말락 스친다. 말린 어깨도 꽤 펴져 작년 여름에는 주구장창 오프숄더 탑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통아저씨처럼 목에 다리는 못 건다. 그것만 못하냐? 아니, 그것 말고도 못하는 건 여전히 수두룩 빽빽. 그런데 ‘굳이’ 목에 다리를 걸거나, ‘당장’ 턱과 손으로만 땅을 버티고 다리를 들어올리거나, ‘기어코’ 무릎 꿇은 채 허리를 꺾어 정수리를 바닥에 대고 싶진 않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나는 매일 수련실로 간다. 원하던 아사나에 도달했을 때 성취감은 당연히 크다. 그런데 한 컷의 사진 같은 완성된 아사나의 희열보다, 몇 번씩 넘어지고 구르고, 잡아주던 분을 본의 아니게 뒷 발로 차고, 산발이 된 채 멍하니 매트에 앉아있는 홈 퍼니스트 비디오 같은 과정 속 하찮고 귀여운 날 보는 잔재미가 내 취향이다. 그러다 매일 다른 내 몸과 마음을 인식하고 거기에 맞춰 움직임과 멈춤을 조절할 때 꽤 그럴듯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겉보기엔 윤슬 같은 호수의 일렁임이겠지만, 실은 풍랑주의보가 발발한 동해 앞바다 같은 성장을 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도 나 스스로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니 지난 일 년간 하나 둘 불가능하다 생각한 아사나를 해냈듯, 어떤 자세도 몇 주,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나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그래서 목에 다리도 못 걸지만 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가 하찮을 때, 간혹 그럴 듯해 보일 때, 기특할 때, 미안할 때, 나는 매트 위에서 매트 밖의 나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요가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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