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무에게

by 만나는 주머니

무야.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지는 날이 있어.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는 말들을 마구 해버리고 싶은 그런 날 말이야.

손톱이 너무 금방 자란다는 말 이라던지, 이상하게 오늘은 커피가 안 마시고 싶었다는 말 이라던지, 오늘 다섯 번을 크게 넘어질 뻔했는데 다섯 번 다 넘어지지 않고 멋지게 착지했다는 말 이라던지,

그것도 아니면 내일은 얼음이 얼 것 같다는 말이나 하늘에 별을 별이라 부르지 않고 흙이라 부르면 안 되냐는 말 같은 것도 상관없어.

무야. 나는 정말 아무 상관이 없어.

무야.

무야. 어제는 꿈을 꾸었어.

지하철을 탔는데 말이야. 손잡이를 잡고 앞을 보는데 유리창에 무의 얼굴이 비치는 거야. 왼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무가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어. 한 10년쯤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듯이 말이야.

무야 - 하고 불러보았어. 그랬더니 무가 누구세요? 라고 되묻는 거야. 순간 나도 아, 그래. 무 일리가 없지 생각하고는 아,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고 얼굴을 드니 무가 나를 보며 히-이 하고 웃는 거야. 놀랬잖아! 하고 나도 피 - 하고 웃어버렸지.

그렇게 둘이 나란히 서서 한참을 가다가 내가 무에게 물었어.

근데, 무 당신이 왜 여기에 있어?

그랬더니 무가 대답했어,

나는 계속 여기에 있었어. 네가 꼭 올 것만 같아서. 결국 이렇게 왔잖아. 수고했어. 잘 왔어. 고마워.

나는 지하철 안에서 무의 목을 껴안고 엉엉, 울어버렸어.

미안해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미안해.

고마워.

아침에 일어나 보니 눈이 많이 부어있었어. 무야. 나는 한참을 거울을 봤어.



무야. 우리 회사에는 반짝반짝 이모님이 계셔.

이모님이 지나가시는 곳은 어디든지 반짝거려서 나와 과장님이 붙여드린 별명이야. 얼마나 반짝반짝하냐 하면 우리 회사 화장실의 변기를 지금 당장 도자기 가게에 가서 백자라고 말하고 팔아도 믿을 정도.

너 지금, 에이 - 하고 웃고 있지? 거짓말 같지만 사실인걸.

이모님은 아주 작은 몸집에 늘 손에는 커다란 고무장갑을 끼고 계셔. 연세는 60대 초반쯤 되어 보이시는데,

정말로 이모님이 60대이신지 아니면 이모님이 살아온 세월들이 이모님을 60대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이모님은 늘 나에게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고무장갑 낀 손으로 입을 가리시며 말씀하셔.

'닦는다고 닦는데.. 부족하면 꼭 좀..'

나는 반짝반짝 이모님의 그 말씀이 왜 그렇게 슬픈지 모르겠어.

휴게실에 크리넥스가 떨어져서 창고에 올라가 아무 생각 없이 창고문을 덜컥 열었는데,

캄캄한 창고 안에서 손에 고무장갑 대신에 분첩을 들고 얼굴에 분을 칠하고 계신 반짝반짝 이모님을 보았어.

이모님은 뭐가 그리 당황스러우셨는지 손에 들고 계신 분첩을 떨어뜨리셨고, 나는 늘 고무장갑을 낀 손에 가려져있었던 이모님의 입을 처음으로 봤어. 이모님의 앞니가 보통 사람들의 앞니보다 많이 작고 뒤틀려 있었어.

생각해 보니 이모님은 가끔씩 나를 마주치시면 내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져보시기도 하고, 내 원피스에 살짝 손을 대 보시기도 했었어. 마치 손을 대면 그것이 닳아버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의 모든 것을 반짝거리게 만드시는 이모님은 사실, 본인을 최고로 반짝이게 만들고 싶으셨는지도 몰라.

그래서 그렇게 닦고, 닦고, 또 닦고.

변기를 도자기로, 반짝거리게 만드셨는지도 몰라.

무야. 나는 분첩을 떨어뜨리시는 이모님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문을 닫고 허겁지겁 나와버렸어.

"이모님 피부가 워낙 좋으셔서 화장 안 하셔도 예쁘신걸 뭘!"

이라고 말하지 못했어. "이모님 웃으시는 거 꼭 소녀 같으셔요!”라고도 말하지 못했어. 아니, "저 크리넥스 찾으러 왔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라도 말했었으면 좋았었을 걸.

나는 결국, 분첩을 떨어뜨리며 당황하시는 이모님을 보고 덩달아 당황하며 문을 닫고 나와버리는 사람밖에 못 되었던 거야.

나는 아직도, 그 정도였던 거야.

무야. 나는 반짝반짝 이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

테라스의 유리를 반짝반짝하게 닦아 둔다던지, 쓰레기통을 깨끗하게 비워두고 퇴근을 한다던지, 책상 위에 쿠키 한 봉지를 올려 놓는다던지, 아니면

이모님이 내 머리카락을 만지실 때에 나도 이모님의 손을 가만히 잡아본다던지 하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그것뿐이야.

내 자리로 돌아와서 하다 말았던 업무를 하려고 책상에서 파일을 꺼내다가,

무야 나는 내 엄지 손가락의 살을 같을 베어버렸어.

피가 새 나오는 것을 보니 갑자기 펑. 하고 눈물이 터져버렸어.

하나도 아프지 않았는데 말이야.

몇 달 동안 한 방울도 흐르지 않도록 꾹 잠가 놓았었는데 말이야.

참. 바보 같아.

무야. 나는 아직도, 이 정도였던 거야.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에 침대에 누워 빨리 잠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기도를 하다가

나는 문득 내일 아침에 눈이 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대로 쭉, 잠만 자버렸으면, 했었어.

그런데 꿈속에 무가.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무야. 나는 무가 누구인지 몰라.

무는, 무일 수도, 무가 아닐 수도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진정한 무일 수도 있겠지.

무야. 나는 그렇지만 정말 아무런 상관이 없어. 그렇게 생각해.

무야.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는 말만 잔뜩 하고 싶은 날이 있잖아.

아까 무지막지하게 매운 떡볶이를 먹어서 그런지 속이 많이 쓰라려.

정말, 무지막지하게 매운 떡볶이를 먹어서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어.

지금은 단지, 그뿐이야.

머리를 아주 짧게 자를 때가 되어 버린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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