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21. 휠체어를 타고 아버지 칠순 잔치에 갑니다

by A록


“아버지 칠순 잔치 예정대로 다음 달에 해야겠어. 코로나가 언제 잠잠해질지 몰라서. 어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잘 못 걸어서 못 간다고 얘기하면 오빠가 놀랄까 봐

“어, 그래. 다음 달에 해. 갈 수 있어.”라고 얘기를 해버렸다.

다음 달이니 매일 죽어라 치료하면 어느 정도 멀쩡하게 걸어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한 달을 치료에 매진했다. 그런데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집 앞 몇 걸음도 힘든데 서울에 가야 된다고 생각하니 막막했다. 공항 내에서 걸어야 할 거리가 꽤 긴데 그걸 겨우 걸었다 쳐도 그 이후에 내 몸이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었다. 거기서는 쑥뜸 치료도 못 하고 3일을 버텨야 되는데 통증이 너무 심해지면 어쩌나 걱정이 되고 무엇보다 그렇게 아픈 모습을 가족들에게 보여주는 게 끔찍하게 싫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이 바뀌었다.

‘이렇게 아픈 모습을 보여주자.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지 보여주자.’


나는 애초에 아버지의 칠순 잔치를 축하하러 갈 마음이 없었다. 나의 어린 시절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만나 따지고 싶었다.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 했던 이야기를 저 깊은 동굴에서 끄집어내고 싶었다. 몸이 너무나 아플 때 혹시 내 마음의 상처가 몸까지 아프게 한 게 아닐까 생각했고 그 상처가 나으려면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공항에서 휠체어를 탔다. 생각보다 이용 구간이 짧았지만 그래도 아픈 걸음을 그만큼이라도 덜 걸을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아이들은 휠체어를 탄 엄마가 신기해서 서로 끌어주겠다고 난리였다. 사람들은 우리를 짠하게 보겠지만 나는 그저 편했고 아이들은 그저 즐거웠다. 그런데 휠체어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걸어야 했을 때 사람들의 시선이 죄다 몰렸다.


‘어머, 저기 저 젊은 엄마 봐. 안 됐다, 애들이 아직 어린데...’

‘어디, 얼마나 절뚝거리는지 한 번 보자.’

하는 듯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꽤 불편했다. 오랫동안 아픈 사람들은 이런 순간을 얼마나 많이 감내하고 살까 싶었다.


남편의 팔을 붙들고 겨우 걸어 택시를 타고 잔치가 열리는 호텔로 갔고 나는 칠순 잔치가 차려진 호화로운 공간을 보았다. 나와 오빠의 돈 수백만 원이 쏟아부어진 공간이었다. 온갖 꽃장식과 풍선 장식이 되어있었고 아버지의 칠순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몇 시간 후면 쓰레기장에 쳐 박힐 저 장식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하면 몇 년치 식비가 되고도 남을 돈이었다. 오빠가 호텔에서 하자고 해서 억지로 마음을 내어 돈을 보탰지만 역시나 달갑지가 않았다.


예쁜 드레스를 입은 두 딸은 신이 나서 여기저기를 뛰어다녔다. 나는 자리에 앉아 다른 가족들과 인사를 하고 주인공인 아버지와 그 옆에 있는 어머니를 보았다. 역시나 세상 뿌듯한 얼굴이었다. 와인을 잔에 따라 축하를 하며 건배를 하고 차례대로 나오는 이탈리안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는데 나는 잠시 숨을 돌린 후에,


“여덟 살이었던 제가 집에서 알몸으로 쫓겨나 지하실에서 벌벌 떨고 있을 때 슬리퍼 한 켤레를 갖다 주고 돌아서서 갔던 아버지가 칠순을 맞으셨네요. 엄마가 어린 저를 여러 번에 걸쳐 심하게 때렸다는 걸 아마도 모르셨을 아버지이시죠. 기뻐 보이십니다. 저는 기쁘지 않지만요. 칠순까지 그렇게 무지하게 사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의 잔치를 위해 수백을 쏟아붓고 준비한 오빠와 부산에서 올라온 여든 살이 넘은 할머니를 생각해서 꾹 참았다. 참여해준 가족들에게 감사하다고 대충 얼버무리며 내 차례를 넘겼다.


그리고 오빠가 잡은 숙소로 갔다. 부산에서 올라온 가족들과 우리 가족을 위해 마련된 도심 속 깔끔한 숙소였다. 밤이 되자 나는 다리가 너무 아파 걸을 수가 없었다. 거기서 기어 다닐 수가 없어 나는 일찌감치 방에 들어가 누웠는데 오밤중에 화장실이 너무 가고 싶었다. 거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오빠와 삼촌들, 이모부, 남편의 소리가 들려서 남편을 불렀고 남편에게 몸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질질 끌려가다시피 해서 화장실을 가야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다들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낮에는 이를 악 물고 잘 걷는 척을 해서 조금 절뚝거리지만 그런대로 괜찮은 줄 알았을 테니 놀라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지 않고 다시 남편에게 질질 끌려 방으로 들어가 누웠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에게 지금 중요한 건 저들의 걱정이 아니다. 내일 부모님과 나눌 이야기다. 나는 담판을 지으러 여기에 왔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