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새벽.
성문은 안방에서 잠을 자던 중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오자 창가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윤수니? 뭐 해 거기서?”
윤수가 커튼을 치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부드럽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뗐다.
“잠이 오지 않아서요.”
“린 때문에 그러지?”
성문은 거실을 가로지르며 말했다. 냉장고 문을 열어 생수통 뚜껑을 딴 뒤 컵에 물을 담았다.
“마실래?”
성문이 컵을 내밀자, 윤수는 대답 없이 창밖을 바라봤다. 성문은 냉수를 들이켠 다음 입을 뗐다.
“오늘 오전이면 린을 찾을 수 있을 거야.”
“죽은 채로 말이죠?”
성문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위로한답시고 린을 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그다음은 생각하지 못했다. 윤수의 말대로 지금까지 찾지 못했다는 건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또 모르지. 살아 있을 수도...”
윤수는 몸을 돌려 다락방 위로 올라갔다. 성문은 하던 말을 멈췄다. 누구보다도 낙심이 클 것을 알기에 해줄 말이 없었다.
아침이 되자 전화기 벨이 울렸다. 성문이 수화기를 들자 민환이었다. 마을과 학교가 뒤숭숭하니 며칠간 학교 수업을 쉬겠다는 말이었다. 성문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다락방 위를 올려다보자 윤수는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성문은 잠에서 깬 김에 겉옷을 챙겼다. 그대로 밖으로 나와 학교로 향했다. 기찬이 엄마가 목을 매달고 죽었다는 곳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시간이면 경찰도 없을 테니 방해받을 일도 없었다.
성문은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중간에 징검다리를 건널 때는 고개를 들어 이곳저곳을 살폈다. 혹시나 린이 개울가 돌부리 걸려 있을까 확인한 것이었다. 이곳은 수심이 얕으니 발견된다면 여기가 맡을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 형체로 보이는 건 어디에도 없었다.
성문은 걸음을 재촉해 학교 정문에 다다랐다. 운동장 안으로 들어가자 저만치에 은행나무가 보였다. 화단에 심어져 있었는데, 가지 하나가 유난히 길어 2층 창문에 닿아 있었다. 기찬이 엄마는 그곳에서 목을 매달고 죽은 채였다. 전날 밤에 남편과 사소한 다툼을 했다고 하나, 목을 맬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목을 맨다고 해도 자기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목을 매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성문은 걸음을 멈춘 뒤 시뮬레이션을 해보기로 했다. 내가 저곳에서 자살을 한다고 가정을 해보자는 것이다. 성문은 기찬의 엄마가 된 것처럼 천천히 은행나무 쪽으로 걸어갔다. 들키지 않아야 하니 등교 시간보다 이른 아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문은 이윽고 은행나무 앞에 다다른 뒤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에서 보니 나무 위로 올라갔다는 게 쉽지 않아 보였다. 점프를 해 머리 위에 있는 나뭇가지를 잡아야만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성문은 점프를 해 양손으로 나뭇가지를 잡은 다음 한쪽 다리를 걸쳐 위로 올라갔다. 나무 기둥을 타고 한단 계 더 위에 있는 나뭇가지 위로 올라섰다. 이 나뭇가지 끝이 바로 기찬이 엄마가 목을 매고 자살한 지점이었다. 약 3m 높이였다. 성문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여자의 운동신경으로 여기까지 올라올 수도 없거니와 나뭇가지 끝에 기어간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친 행동이었다.
미친 행동이라.
성문은 잠시 생각한 뒤 나뭇가지를 타고 기어갔다. 나뭇가지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흔들렸다. 성문은 미쳐보자며 엎드린 채로 포복 이동을 했다. 드디어 끝에 다다른 뒤 양손으로 철봉을 하듯 나뭇가지를 잡았다. 이 자세가 목을 매단 높이였다. 성문이 팔을 쭉 피고 있자 교실 2층 창문과 발끝이 맞닿았다. 성문은 다시 힘을 줘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다. 뒤로 기어가던 중, 교실 창문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을 봤다. 깜짝 놀라 앞을 바라보자, 어느새 사라졌다.
성문은 나무 위에서 착지를 한 뒤 고개를 들고 다시 교실을 올려다봤다.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는데, 아까도 열려 있었던 건지 헷갈렸다. 성문은 바로 걸음을 옮겨 교실로 향했다. 1층 복도를 지나 2층으로 빠르게 뛰어갔다. 복도를 가로질러 교실 앞문을 세차게 열었다.
햇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어두컴컴한 교실이었다. 천장에 있는 형광등이 모조리 박살 난 상태였다. 민환은 다시 문을 닫고 옆 교실로 이동했다. 다시 빠르게 앞문을 열었다.
드르륵- 탁!
이 교실이었다. 오른편에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고, 바로 그 옆에 무언가가 있는 걸 보았다. 성문은 천천히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책상을 짚으며 창가로 향하던 중, 무심코 손으로 짚은 챙상을 내려다보았다.
〔죽여 버릴 거야.〕
글귀가 써져 있었다. 성문은 옆에 있는 책상을 봤다.
〔너도 죽여 버릴 거야.〕
뒤에 있는 책상을 봤다.
〔너도〕
〔너도〕
〔미안〕
성문은 미안이라고 써져 있는 책상을 보고 멈칫했다. 수첩을 꺼내 책상 배치도를 그렸다. 그리고 글귀를 따라 적었다.
〔죽여 버릴 거야.〕 〔너도 죽여 버릴 거야.〕
〔너도〕 〔너도〕
〔 〕 〔미안〕
책상 하나만 아무런 글귀가 적혀 있지 않았다. 성문은 한동한 책상에 적힌 글귀를 유심히 쳐다봤다. 수첩을 덮고 교실을 나갔다.
***
성문은 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다. 중간에 개울가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나 린은 보이지 않았다. 징검다리를 건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집이 보였고, 성문은 창가에 서 있는 윤수를 발견했다. 새벽에 서 있던 그 자리였다. 윤수와 눈을 마주치자 성문은 시선을 피했다. 이내 집 앞에 다다라 현관문을 열었다.
“어디 갔다 오신 거예요?”
“그냥 답답해서 바람 좀 쐤어.”
성문은 겉옷을 벗던 중 방바닥에 수첩이 떨어졌다. 윤수가 그것을 쳐다봤다. 성문은 아무렇지도 않게 수첩을 다시 겉옷에 집어넣었다.
의자에 겉옷을 걸쳐 놓은 뒤 말했다.
“민환이가 아까 전화 왔는데, 며칠간 학교 수업하지 않겠대.”
“그럴 거 같았어요.”
“너도 당분간 공부 생각하지 말고 쉬어라.”
“이사는 언제 가실 거예요? 다음 주에 간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가야지. 최소 이번 달 안에는 갈 거야.”
“알았어요.”
대답을 한 뒤 화장실로 들어가는 윤수였다. 성문을 힐끔 그를 쳐다봤다. 린이 안전해질 때까지는 절대로 이사를 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반응이 달랐다.
화장실에서 샤워기 호수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성문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는 겉옷에 넣어뒀던 수첩을 꺼냈다. 재빨리 다락방 위로 올라갔다. 윤수의 책가방을 뒤져 공책 하나를 꺼냈다. 수첩을 펼침과 동시 윤수의 공책도 같이 펼쳤다. 성문은 윤수가 쓴 글씨를 확인했다. 조금 전 교실에 쓰여 있던 필체와 동일한지 비교하기 위해서였다. 성문은 수첩에 글씨를 쓸 대 최대한 책상에 있는 필체와 똑같이 썼었다. 누가 책상에 그런 낙서를 한 건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화장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끊겼다. 성문이 화장실 쪽을 쳐다보다 이내 세면대에 물 트는 소리가 들렸다. 성문은 다시 고개를 바로 하고 수첩에 쓴 필체와 윤수가 쓴 필체를 확인했다.
사람의 필체는 모음보다 ‘자음’에서 차이가 난다. 이를 테면 ‘ㄹ’ 쓴다고 가정했을 때, 누구는 한 획에 쓰지만, 어떤 사람은 4획에 쓰기도 한다. ‘ㅂ’ 자를 쓸 때도 마찬가지다. 각지게 쓰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둥근 모양으로 쓰는 사람도 있다. 곧 필체는 ‘획수’와 ‘모양’으로 비교하면 된다. 성문은 다년간 형사 생활을 하면서 필체를 확인하는 노하우를 터득했다. 그 결과 윤수는 자음을 똑같은 획수와 모양을 구사하고 있었다.
세면대 물소리가 끊겼다. 성문은 빠르게 윤수의 공책을 덮었다. 가방에 공책을 넣고는 빠르게 다락방을 내려갔다. 그 사이 화장실 문이 열렸다.
“배고프지? 밥이라도 먹을까?
성문이 주방을 들어가며 말했다. 윤수가 성문을 힐끔 바라봤다.
“아까 그 수첩 겉옷에 집어넣은 거 아니었어요?”
윤수가 성문 바지 주머니에 있는 수첩을 보고 말했다. 성문은 순간 뜨끔했지만 표를 내지 않았다.
“아, 뭐 좀 볼 게 있어서.”
“뭔데요?”
“아무것도 아냐.”
성문은 윤수가 더는 묻지 않기를 바랐다. 여기서 더 캐물으면 둘러댈 자신이 없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그래서 말을 돌렸다.
“아무 거나요.”
윤수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말했다.
“그래, 그럼 아무거나 자신 있는 걸로 해보마.”
윤수는 들은 체 만 체하며 다락방으로 올라갔다. 성문은 그를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윤수가 책상에 그런 글을 쓴 게, 낯설기도 했지만, 문제는 이상하다는 것이었다. 곧 그럴 시간이 있었느냐에 대한 문제였다.
성문이 알기론, 윤수는 교실을 청소하다가 기찬이 엄마가 죽은 걸 발견한 후, 교무실로 이동했다. 경찰이 현장보존을 하고 시신을 수습을 할 때, 윤수는 분명 린을 만났다. 그리고 린이 폭포에 떨어졌다고 한 뒤, 지금까지 줄곧 집에 있었다. 그러니까 책상에 그런 글을 쓸 여유가 없었다는 뜻이었다.
불현듯 새벽에 윤수가 거실에 혼자 서 있던 게 떠올랐다. 그럼 그때 나갔다 왔다는 말인가? 그게 더 말이 되는 거 같지 않았다. 성문은 요리를 하며 자신이 수첩에 적은 필체와 똑같은 사람이 더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
성태와 상태가 폭포 옆 절벽 위에 섰다. 아찔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성태가 워! 거리며 상태를 밀치는 동작을 취했다. 성태는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아, 행! 하지 마라!”
“와, 너도 린처럼 빠질까 봐 놀랐나?”
성태는 연신 킥킥거렸다. 두 사람 뒤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렸다.
“기찬이는 안 왔나?”
구형석이 말했다.
“어? 행님! 기찬이 햄 아직 안 왔다.”
상태가 화색을 띠며 말했다. 성태가 구형석에게 다가가 입을 뗐다.
“행님, 어제 린도 여기에 빠졌다는 얘기 들었제?”
“들었다.”
“죽었을라나?”
“수영 못하는 바보는 죽지.”
“무섭다, 물귀신으로 나타나는 거 아이가.”
상태가 폭포 아래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멍청아, 귀신이 어딨냐?”
성태가 말했다.
“행님 아부지가 말했다 아이가. 발목 잡아당기는 물귀신이 있다꼬.”
“그건 니들 깊은 데 못 들어가게 하려고 하는 말이지.”
“아이다. 형석이 행님. 진짜 물귀신 있지? 그지?”
“몰라, 니들이 알아서 해라.”
그 말을 하고 뒤돌아서는 형석이었다.
“행님. 어디 가?”
“재미없어서 가게. 너희도 집에 가.”
“방금 나왔는데?”
“행님아 가자, 나 여기 처음부터 오기 싫었다.”
상태가 성태의 팔을 잡아당겼다. 성태도 어쩔 수 없다며 결국 몸을 돌렸다.
***
성태와 상태가 나란히 집으로 향했다.
“행님 우리 다시 학교 언제가?”
상태가 물었다.
“몰라. 난 안 갔으면 좋겠다. 폭포보다 거기가 더 무섭다.”
“기찬이 행 아줌마가 귀신으로 나타날까 봐?”
“넌 무슨 죽은 사람들이 다 귀신으로 나타나는 줄 아냐.”
“아빠가 저녁에 나가면 죽은 귀신 볼 수 있다고 했다.”
“그것도 너 저녁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그런 거지 멍청아.”
상태는 하루 종일 조마조마했다. 사실 이 감정은 학교에서 형광등이 터져나가고, 기찬이 머리에 유리가 박힐 때부터였다. 자연 형상이라기에는 이질감이 잔뜩 묻어났다. 거기다 린이 구형석에게 맞아 거품을 물며 쓰러졌을 때는 정말로 죽는 게 아닌가 싶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진짜로 죽은 사람을 봤다. 기찬이가 놀라 엉덩방아를 찍은 걸 보고 창밖을 내다봤다가 보지 못할 광경을 접했다. 사람의 혀가 가슴까지 내려온 걸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날 린이 폭포에 빠졌다는 소식까지.
상태는 오늘만큼은 집에서 나가기 싫었다. 나갔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구형석이 전화로 나오라고 해서 나갔지만, 빠르게 집에 돌아가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 행님아?”
상태는 생각에 잠겨 있다가, 성태가 없어졌다 걸 깨달았다.
“행님아? 어딨어! 장난치지 말 그레이!”
상태가 주변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하지만, 하지만 정전이 정전이 된 듯 조용한 산길이었다.
그리고...
상태의 등 뒤로 검은 물체가 다가왔다. 상태는 앞만 본채로 고개만 왔다 갔다 할 뿐 누군가가 자신에게 접근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