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놀이 걷혀진다 문 득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 스치는 생각들.
모두 각자의 불만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현재 사회에 대해서 그 끝을 알 수 없는 모호한 불만과 내팽개쳐진 서운함이 잠재하고 있다. 서운함에 둘러싸인 울컥함은 늘 서러움을 내포하고 있다. 어디서라도 조금만 날카로운 가시나 송곳이 스치기만 해도 쏟아질 거 같은 눈물을 다만 아직 억제하고 있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폭포 같은 울음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울지 못하고 설컹설컹 대충 되씹어서 울음을 삼킨다. 쏟아 낼 만한 곳도 받아 낼 만한 것도, 대상도 마땅한 장소도 없기 때문이다. 철저하게 타자화 되어버린 자기라는 곳에서.
나의 불만을 직시한다. 이 불만의 근원은 무엇이며 끝은 어디인가? 불만은 그 뿌리가 어딘지 모르게 부표를 닮아 있다. 서럽게 억제된 불만은 현재가 막연하기 때문이다. 매달려 철렁철렁 소리라도 내어야 할 서러운 풍경은 울리지도 않는다. 바람이 불어도 울리지 않는다. 소리가 나려면 얼마나 바람이 세차게 더 불어야 한다는 말인가. 소리 나는 종이 되려면 어떤 식으로든 정교하게 조건이 맞아야 한다. 어디를 쳐야 종은 울리나.
부표처럼 떠 있는 불만을 대면하자마자 객관화된 불만은 저만치서 멀뚱하게 쭈뼛 서 있다. 어쩌면 너와 나는 굳이 겹쳐 있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다. 부표 같은 불만에서 오는 서러움이라는 것 ㅡ 이제 지금 이 순간을 부여잡노니 ㅡ 불만은 곧 힘으로 화 하리라. 불만의 근거가 부표라면 불안의 근거도 부표일 것이다. 곧 사그라진다. 불안의 근원은 미래다. 막연한 미래가 현재의 자리를 잠식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를 산출한 수축으로 생겨나는 지속이며, 현재의 기준은 과거와의 낙차관계로만 바로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낙차는 미래이기도 하다. 매 순간 현재의 부족분을 미래와의 낙차로서만 극복해 가는 것이다. 과거는 늘 미래였다. 미래 아니었던 과거는 없었다. 현재 아닌 과거도 없었다. 현재가 있기에 순간의 어떤 기준점에 의해 과거와 미래로 시간이 매 순간 분할되는 것이다. 그 분할되는 형태가 필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필름을 압축하여 하나의 대표 이미지로써 과거라는 기억이 만들어진다. 불만 또는 불안은 시간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있다. 가장 목을 조이는 것도, 자유를 주는 것도 시간이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