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두 크로노스적 고통에 직면해 있다."
(문득 이렇게 떠올라 문구로 써 보았다. 쫌 이 문구가 맘에 들었다. 그래서 생각을 더 끌고 들어가 보았다. 흐르는 데로)
제우스가 크로노스를 찢어서 안에 있는 것들을 꺼냈다고 해서 크로노스 자신은 과연 해방되어 좋은가?라는 하나의 의문이 여기에 있다.
꺼내도 괴롭고 안 꺼내도 괴로운 것은 인간이 직면해 있는 본질적 사태다.
그러나 송곳은 어떻게든 뚫고 나가 제 갈 길 가게 된다는 송곳의 본질도 있다.
크로노스에게는 과연 그것이 선택의 문제이었던가? 분화되고픈 욕망과 억제하는 욕망 사이에서, 분화되고픈 완전체로의 독립에 대한 욕망은 별개의 욕망으로써 크로노스의 욕망의 개입을 제한한다. 그런 것일까? 크로노스 안에서의 욕망은 여러 개의 욕망으로 분화되어 성체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크로노스의 욕망과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일까?
무수하게 많은 크로노스적 억제가 인간 안에 잠재되어 있다. 크로노스가 억제의 욕망이라면 제우스들은 분화의 욕망이다. 그러나 크로노스가 계속 억제하였다면 크로노스가 언젠가 안으로부터 터졌을 것이라는 예측을 우리는 쉽게 유출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제우스들이 크로노스를 억압상태로 놓아 두어 유폐시켰다는 것 역시 치명적인 약점이다.
크로노스에게는 그 무엇도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존재하게 된 최초의 계기는 혼돈의 에너지였다. 이 혼돈의 에너지는 모순 그 자체이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에너지이다. 크로노스에게는 존재한다는 것 외에 그 무엇도 없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무'다. 불가항력적인 에너지 그 자체이므로 크로노스에게는 결정권이 없다. 정해지지 않은 모순 그 자체이므로 또한 '유'다. 모순은 모순으로 나아간다. 모순 그 자체에서 분화된 욕망 역시 모순이다.
인간은 자기 안에 무수한 모순을 품고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