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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란도 Oct 26. 2024

폐사지의 무상감

    




폐사지 터에 가서 앉을 만한 것을 찾을 때, 의자 형태면 사람은 모두 거기 앉는다. 폐사지 터에서 사람이 경험하는 것은 무상'감이다. 기둥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나 세월 안에서 기둥이 사라지고 사람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는 것이나, 받침의 역할은 모두 동일한 것이다.    

 

거기에서 인간이 느끼는 감정이 중요하다. 인간은 왜 폐사지 터에서 무상함을 느끼며 동시에 무한한 상상력의 빈 공간이 형성되는가? 이러한 공간에서는 그것을 사유하면 되는 것이지 빈 터에서 인간이 도대체 무엇을 하겠는가.     


저 돌이 인간의 손을 거쳐 석축이 되고 그 자리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그 재질이 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돌부처는 오래 남는다. 돌부처에 절할 때는 오히려 그런 은폐된 이면을 가슴에 담아야 한다. 무엇이 오래 남는가이다.     


앙코르와트 사원, 그 많은 이끼 낀 인공적인 석물들.

그 사원 그늘에 걸터앉아서 책을 보거나 이내 석양빛을 보며 명상에 잠기거나 하는 풍경들은 모두 폐사지 터에서 인간이 각자 그 공간을 느끼는 모습이 아니던가.    

 

그 무수한 석물에 앉아 보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받침의 형태란 사람에게 앉아 보게 한다. 그것은 몸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사각형 모양으로 다듬어진 돌들은 세월에 의해 풍화되었지만 여전히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기둥을 받치고 있는 주춧돌이나 석축에 걸터앉거나 기대고는 한다. 그리고 앞을 보며  멀리 있는 곳을 바라본다.      


지나친 신성함은 오히려 터부적인 것이 된다. 자연으로 되돌려진 공간에서 느끼는 무상감을 돌만이 그 시간의 텅 빔을 위로해 준다. 무상감은 인간을 안으로 수렴시킨다. 공간이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기에 그때, 사람은 침묵한다.     


가장 무상감을 주는 터는 폐사지이다. 어느 폐사지, 잡풀이 우거지고 돌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던 그 풍경에서 받은 어떤 고적감은 가장 기억 깊숙이 자리하고서 또다시 지각에 반영된다.     


고려 말에 길재의 시조는 바로 그 무상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옛 도읍의 흔적이 사라지고 옛 궁궐터에 잡초가 무성할 때 거기서 오는 무상감은 수백 년의 시간이 한순간에 압축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화자의 감정이 지금의 나에게도 전달되는 바로 것. 그래서 현재에서 소통되는 바로 그 감정.      


오백 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자연과 문명 그리고 빈터에 드문드문 남은 인공물의 흔적,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 예술을 촉발하는 영감을 준다. 무상에 대한 사유는 빈 공간에 대한 사유이기도 하다. 현존재에게는 바로 그것이 필요하다. 현대의 건축물 방향성을 보면 바로 감이 와야 한다. 폐사지 터에서 느끼는 그 감정과 다를 것이 있는가.     


모든 과거 유적을 다 복원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어떻게 현재에서 빈 공간감을 살려낼 것인가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다. 공간과 장소는 각 시대에서 살아난다. 만약에 옛 문명이 허물어지지 않고 영속되었다면 현재의 건축도 없는 것이다. 


최초의 문명이 허물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사유도 영성도 문명도 예술도 문화도 시간이 멈춘 채로 있게 될 것이다. 이 시대의 건축물은 그런 문명의 흔적들이 남긴 잔상에 대한 감각일 것이다, 흔적을 사유하는 일은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 사진 / 흥법사지 터 / 펜스가 없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다. 이런 빈 공간감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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