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 교재, 학비가 없는 학교
2017년, 나는 프랑스에 있는 에꼴42를 방문했다.
애플 로고가 반짝이는 컴퓨터 1,000대가 우리를 맞이했다.
그곳은 교사도 없고, 학비도 없었다.
안내자는 말했다.
“이곳은 설립자 자비에 니엘(Xavier Niel)이 유럽에도 실리콘밸리 수준의 프로그래머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시작했어요.”
‘에꼴42’라는 이름은 설립자가 감명 깊게 읽은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따왔다. 그 소설 속 숫자 42는 삶과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해답이었다.
이 학교 역시 “배움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답하고 있었다.
1층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벽에는 그래피티가 가득했다.
자유로움이 공간을 감쌌다.
계단 난간에는 알록달록한 수건들이 줄지어 걸려 있었다.
입학 과정인 ‘라 피신(La Piscine)’에 참여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기 때문에 생긴 풍경이었다.
그 장면이 인상 깊었다.
라 피신은 프랑스어로 ‘수영장’을 뜻한다.
말 그대로, 지원자 전원을 수영장에 풍덩 빠뜨려 놓고
끝까지 헤엄치며 살아남는 사람을 뽑는 과정이다.
에꼴42는 18세에서 30세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다.
학위도, 성적도, 입학금도 필요 없다.
누구에게나 열린 문이었다.
하지만 그 문을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매년 7만 명 이상이 지원하지만, 최종 선발 인원은 1,000명에 불과하다.
라 피신에서는 한 달 동안 집중 코딩 캠프가 이어진다.
학생들은 하루 10시간 이상 스스로 문제를 풀고,
동료에게 배우며 협업한다.
가르침이 아니라 ‘스스로 배우는 법’을 익히는 시간이다.
동료학습은 그들에게 하나의 교육 철학처럼 보였다.
안내자는 말했다.
“코딩은 몰라도 괜찮아요. 중요한 건 협업이에요.”
애플 컴퓨터를 켜면 새로운 프로젝트가 열린다.
RPG 게임처럼 교육 프로그램이 설계되어 있었다.
‘레벨 0’에서 ‘레벨 21’까지.
학생들은 3년 동안 100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며
코딩에서 AI까지 확장된 주제를 배운다.
이 과정을 설계한 사람은 공동 설립자이자 초대 교장인
니콜라 사디락(Nicolas Sadirac)이다.
그는 “1년간 동료학습을 경험한 학생은 폭발적으로 성장한다”라고 말했다.
공식을 전수하는 교육보다, 지식을 새롭게 만드는 경험을 중시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새로운 배움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점을 경계했다.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레벨 업’이었다.
새로운 단계를 통과할 때마다 게임처럼 선물 상자가 열렸다.
여행권, 상품권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었다.
배움이 놀이처럼 느껴지고, 도전이 가벼워지는 장치였다.
도파민이 적절히 개입된 배움의 설계랄까.
가르치는 사람은 없지만, 배움을 지원하는 스태프는 있었다.
그들의 방에는 주식 시세판 같은 전광판이 걸려 있었다.
학생들이 어느 프로젝트를 수행 중인지, 어느 단계에 머물러 있는지를
데이터로 모니터링했다.
누군가 비슷한 수준에서 오래 머물면 방향을 제안하거나,
스스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에꼴42는 지금 전 세계 30여 개국, 50여 개 캠퍼스로 확산되었다.
그중 하나가 한국의 ‘에꼴42 서울(Seoul 42)’이다.
서울 개포동에 위치해 있으며, 프랑스 본교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는 사기업 오너가 설립했지만,
한국은 국가 기관이 운영한다는 점이 달랐다.
온라인 테스트를 통과하면 라 피신(La Piscine)에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다.
나도 졸업을 앞둔 학생들과 함께 견학을 갔다.
한 학생이 군 복무 문제를 물었다.
안내자가 웃으며 말했다.
“로그아웃했다가 제대 후 다시 로그인하면 됩니다.”
짧은 답변이었지만, 그 안에 학교의 유연한 철학이 담겨 있었다.
한국 캠퍼스에는 프랑스에는 없는 제도도 있었다.
프로젝트 수행 중 막히는 과제가 생기면,
전문가를 초대해 ‘키 포인트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래도 중심은 여전히 학생이다.
모두가 서로의 프로젝트를 리뷰하며 배우고 성장한다.
이 학교는 국가 공인 졸업장이 없다.
하지만 기업들은 이 학교 출신을 반긴다.
서울42를 방문했을 때도 여러 기업의 리쿠르트 담당자들이 와서
자신들의 회사를 소개하고 있었다.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100개의 프로젝트를 마치기도 전에 학생들은 기업으로 스카우트된다.
실무 중심의 배움, 협업 경험, 의사소통 능력 덕분이다.
한 기업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대부분의 신입사원은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그 말은 역설적으로 에꼴42의 존재 이유를 보여준다.
이곳에서의 학습은 이미 현장과 맞닿아 있다.
가르치는 대신, 실전으로 배우는 학교.
그게 바로 서울의 에꼴42였다.
기후 위기, 디지털 전환, 팬데믹.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변하고 있다.
OECD는 불확실한 미래 사회를 살아갈 힘을 기르기 위해
‘2030 교육프로젝트’를 설계했다.
2030년에 서른 살이 되는 세대를 기준으로,
그들이 어떤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탐색한 것이다.
핵심은 ‘좋은 삶(well-being)’을 주도적으로 만들어가는
학생 주체성(student agency)이다.
교육학자 마크 프렌스키(Marc Prensky)는 말했다.
“이제 학생들은 자신이 만든 로켓을 쏘아야 하는 최초의 세대다.”
과거처럼 주어진 지식을 적용하는 시대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내야 하는 시대라는 뜻이다.
에꼴42는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다.
기술과 학습이 결합된 새로운 교육 모델로,
스스로 배우는 인간이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모델에도 빈틈이 있다.
이제 지구에는 두 개의 지구가 있다.
오프라인 공동체와 온라인 공동체.
전자는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로 문화와 규칙이 만들어졌지만,
후자는 아직 완전한 질서를 갖추지 못했다.
디지털 원주민과 이민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온라인 시민성’에 대한 새로운 교육이 필요하다.
기술이 중심이 된 세계에서
‘어떻게 평등하고 평화롭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이제 교육이 다뤄야 할 다음 질문이다.
<참고자료>
https://whitepaper.innovationacademy.kr/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