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아주 오랜만에 무대에 올랐다. 거의 20년 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마지막 무대를 어디라고 해야 할 지도 막막하다. 정식으로 은퇴한 것도 아니고 어디까지를 무대였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어느 순간 나는 보여주기 위해 추는 춤을 멈추었고 어느새 시간이 그렇게나 흘러버렸다. ‘보여주는 춤’을 멈춘 대신 춤을 나누기 위해 ‘함께 추는 춤’을 택했다. 그리고 춤을 전하기 위해 춤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춤을 추고 춤을 쓰고 춤을 나누는 일을 한다고 소개한다.
그러면서도 마음 속 깊이 무대에 서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무대에서 마음껏 자기를 표현한 후 박수를 받는 모습을 보거나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의 에너지까지 모두 쏟아내며 흘린 땀방울들이 조명에 반짝이는 것을 볼 때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물론 나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 할 정도로 빨리 접어둔 마음이기에 간절한 것은 아니었다. 그 때의 상황이 그랬고 현실을 받아들인 그 때의 선택에 만족했다.
이제 와서 내가 무대에 서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하더라도 그 만한 에너지를 쓸 만큼의 소원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게 무대 설 일이 생겼다. 대구시립무용단의 <Process In It>은 무용이 어렵다고만 하는 사람들에게 무용의 과정을 보여주며 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작품이었다. 감사하게도 작품의 설계부터 공연까지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내가 한 일은 예술감독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답을 찾아가며 하고자 하는 것들이 명확해져갔다. 무대 위에서 움직임 안내자라는 나의 역할은 과정가운데 있었던 일들을 예술감독과 이야기 나누며 무용의 언어를 일상의 언어로 통역하여 관객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와 무언가를 도모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약간의 조언을 구하거나 도움을 주는 것은 할 수 있어도 함께 하는 것은 어렵다. 경력자와 함께 하는 것은 쉬워도 처음 해보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기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아마도 나를 무대에 세우는 일이 그랬을것이다. 내가 잘못하면 공연을 망칠 수도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나는 이전에 그런 역할을 해 본 적도 없는 터였다. 어찌 불안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 마음을 알기에 부담도 컸고 그럴수록 작업에 몰두했다. 스케줄을 줄이고 공연을 위해 시간을 들였다. 내가 무대 위에서 꼭 전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했다. 공연 전 일주일은 대구에서 머물며 작품에 빠져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뒤풀이가 있었다. 때때로 공연 후 매번 갖는 무용가들의 뒤풀이를 보며 소모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공연이 끝나고 밀려드는 그 피로감을 차라리 집에 가서 쉬어야지 왜 술을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어디 그 뿐인가. 때마다 드는 그 비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이번 공연을 하고 뒤풀이가 얼마나 중요한 리추얼인지를 알게 되었다. 공연에 깊이 빠져있었을수록 뒤풀이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연이 끝난 후 일주일은 공연 때 내가 했던 말의 잘못이나 버릇, 수정사항을 되뇌었다. 이미 끝나서 생각할 필요도 없는데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대본을 수정하고 행동을 체크하며 계속해서 혼자 리허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일주일은 작업과정에 대한 그리움이 덮쳤다. 온전히 몰두했던 나의 모습과 함께 했던 이들의 모습. 무대 위에서 경험한 약간의 긴장과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모를 떨림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도 모르게 그리운 마음으로 번져갔다. 빠져있던 만큼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 이래서 뒤풀이가 필요한 거였구나.’
사냥군에게 마취총을 맞으며 살해위협을 당했던 북극곰이 마취에서 깨어나며 온 몸을 격렬하게 떨어내는 영상이 있다. 온 몸에 남아있는 트라우마를 극복해내기 위한 본능적인 과정이다. 어떤 자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의식이 필요하다. 너무나 오랜만에 무대에서 에너지를 쏟으며 받은 막대한 자극을 털어버릴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 필요하다.(뒤풀이가 없었던 것은 아닌데 뭔가 부족했던 듯)
올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해 얼마나 많은 자극들로 우리들의 몸과 마음이 가득 차 있을까? 혹시 아직 해결하지 못해 몸에 저장된 나쁜 기억과 자극들이 있는 것은 아닌가? 삶 가운데 나의 발걸음을 무겁게 했거나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기력을 빼앗는 사건들이 있진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만일 나쁜 감정이 남아있다면 2022년 ‘뒤풀이’라는 리추얼을 통해 남아있는 나쁜 자극들을 비워 내보면 어떨까? 북극곰이 온 몸을 털어낸 것처럼 말이다. 그게 춤이라면 더 좋겠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머릿속이 아닌 우리의 몸에 담겨있다. 다 털어내고 2023년 새해에는 좋은 것을 가득 채우는 한 해가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