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미영 Oct 22. 2023

시간을 붙잡는 방법

어느새 3월이 중반을 넘어섰다. 한 번도 ‘왜 이렇게 느리게 가?’ 라고 느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그래서 그런가. 어떤 이가 30대의 시간은 시속 30km로 가고 40대는 40km, 50대는 시속 50km로 간다고 말했다. 아니 그럼 80대가 되면 시속 80km? 빠르게 가는 시간도 두려운데 나이 먹을수록 더 빨리 간다니 큰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시간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던 것 같다. 매일이 즐거웠고 내일이 기다려졌다. 그 때는 철없이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고 난 지금 그렇게 되고 싶었던 어른이 되어있지만 이제는 시간이 좀 천천이 가길 바랄 뿐이다.

어린 시절의 시간이 지금보다 천천히 갔다고 느끼는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어릴 때는 머리회전이 빨라서 사람, 사물, 세상을 보고 관찰하는 것이 세세해 하루 동안에 얻은 엄청난 정보량 때문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경험이 적은 만큼 매일이 새로우니 새로운 것을 경험하느라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한다. 실제로 미국의 신경학자 피터망간(Peter Mangan)박사의 실험을 보면 노인들이 시간의 흐름을 더 빠르게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청년, 중년, 노년의 세 그룹에게 3분을 세도록 한 실험인데 다른 그룹에 비해 노인 그룹은 30초 이상이 지난 시간을 3분으로 인식했다. 박사는 이러한 이유를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에서 찾았다.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은 새로운 시도, 경험, 운동 등에 의해 더 많이 분비된다. 

나는 최근 독일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이전의 여행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모든 여정을 오롯이 혼자 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혼자 여행도 처음일뿐더러 해외여행이라 엄청난 두려움과 긴장 속에서 일정들을 진행해나갔다. 혼자 비행기를 타느라 수속을 밟는 한 걸음, 한 순간들이 모두 다 떨리는 경험이었다. 숙소를 찾아가고 이동을 위해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탈 때, 하다못해 식사를 하기 위해 무엇을 먹을지, 어디서 먹을지를 정하고 찾아가는 모든 일정들에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렇다고 긴장과 두려움 속에서 하기 싫은 일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처음 하게 된 ‘나홀로 여행’의 1분1초도 잊지 않으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들과 건물, 자연 등 만나는 모든 환경들을 온 몸으로 감각해 나갔다. 아침 산책길을 나설 때 느껴진 알싸하게 코끝을 시리게 한 찬 공기, 사람들이 건네는 낯선 언어의 아침 인사, 카페에서 흘러나오던 향긋한 커피향에서부터 내 옆을 흐르던 시냇물에서 나던 물냄새, 우연히 만난 타인에게 느껴진 호의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앞으로 여행길에서 만나게 될 일들에 대한 기대 등 내 안의 모든 감각들이 예민하게 깨어났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은 늘 모든 감각들을 동원하여 경험했던 것 같다. 그 시절, 기억에 남아있는 한 순간을 떠올려보면 눈앞에 사진이 펼쳐지듯 생생하게 기억되는 주변 풍경뿐만 아니라 나를 포근히 감쌌던 옷의 촉감이나 길에서 나던 고소한 냄새와 엄마의 품에서 나던 로션냄새, 나를 꼭 안아주었던 몸에 남아있는 감각들이 모조리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 때 느꼈던 그 감정, 뿌듯했고 행복했던 감정들도 되살아난다. 물론 반대의 경험도 있다. 동생과 함께 할아버지 집에 맡겨져 울고불던 했던 기억이다. 화로에서 나던 밤 굽는 냄새와 아랫목의 따끈함, 내내 쥐고 울었던 풀 먹인 이불의 까슬함, 함께 울던 동생의 축축한 티셔츠 앞섶 그리고 우느라 숨찼던 심장의 두근거림과 뭔지 모르는게 가슴밑으로 쿵 떨어지는 듯한 불안했던 마음이 다시 되살아난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이렇게 머리 속에만 있지 않고 온 몸에 있다. 친구들과 함께 고무줄 놀이를 하거나 정글짐을 올랐거나 달음질을 하거나 했던 모든 기억은 온 몸에 새겨져 있다. 그 시절은 모든 경험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경험과 계획과 시간을 머리로만 보낸다. 물론 몸을 움직이지만 몸에 무언가를 남기지 않는다. 다리는 걷고 있지만 나의 주의는 온통 생각에 머무른다. 몸을 움직여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내내 몸에 주의를 기울이는 대신 생각을 수행하기 위한 절차로서만 몸을 사용한다. 아니 생각을 수행하기 위해 몸이 사용되어지는 것뿐이다. 그래서 나의 기억은 머리에만 머무른다. 그러다보니 하루가 주요 스케줄 하나로, 일주일이, 한 달이 뭉텅이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면서 나의 시간은 점점 짧아져갔다. 

여행을 하면서 나의 시간은 다시 길어졌다. 시간시간을 온 몸으로 감각하고 호텔로 돌아오면 몸에 기억되어 있는 많은 것들을 되새겼다. 시각, 청각에만 머무르는 경험이 아닌 촉감이나 향기, 정서, 감정 등이 다시 되살아났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시간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은 모든 경험을 온 몸의 감각에 남겨두는 것이라고. 어린 시절이 그랬고 여행이 그랬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도 나는 노력한다. 여행하던 때처럼 현재를 감각하고자 한다. 낯선 곳, 낯선 사람이 아닐지라도 내가 몰랐던 것, 내가 놓쳤던 것들을 찾아나가는 중이다. 같은 길이라도 어제와 다른 것들을 발견하려고 하고 어제와 달라진 향기를 경험하고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들을 새삼 만나는 중이다. 그렇게 매일, 일상을 여행하면 시간이 조금은 천천히 가지 않을까? 그 어느 때보다도 후다닥 지나가 버리는 봄을 맞는다. 너무나 짧아서 너무나 아쉬운 봄을 그렇게 붙잡아본다.

이전 25화 뒤풀이라는 리추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