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히햐
TO. 이별 후 안부를 묻는 내 오랜 벗에게
15년 간의 직장 생활을 접고 퇴사를 결정할 때쯤 너와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난 익숙한 삶의 패턴과 결별하고 싶다고 말했었지. 지금의 사는 대로 살아가는 삶 속에서 내 모습을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내 모습을 다시 찾고 싶다고 말이야. 더 나은 방법을 찾아보라는 너의 만류를 뒤로한 채 난 사표를 던졌지.
친구야, 사실 많이 두려웠어. 명함에 찍혀 있는 타이틀이 나의 전부였기 때문이지. 내가 할 줄 아는 것, 잘하는 일은 대부분 그 명함과 관계된 일뿐이었지. 난 같은 시간이 반복되는 영화 같은 삶을 어떻게든 끊어 내고 싶었고 지금 멈춰 세우는 것 외엔 달리 변화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었어. 그렇게 중간에 난 가던 길을 뒤돌아 내려오게 되었지. 퇴사를 하고 어릴 적 발자취를 따라 미술 공부를 다시 시작했을 때 내 눈에 걸린 그림이 한 점 있었어 독일의 낭만주의 화가인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의 <안개 바다 위의 방랑자>야. 그림 속에는 높은 절벽 위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어. 프리드리히는 압도되는 거칠고 거대한 대자연 앞에 인간의 모습을 대비시키는 그림들을 많이 그려 왔어. 이 그림에서도 절벽 아래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해 버리는 것 같아. 벼랑 아래는 안개로 자욱하고 끝이 보이지 않아서 자칫하면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태로움이 느껴지기도 해. 뒷모습을 보이는 이 남자는 더 이상은 오를 수 없는 한계를 느낀 것 같아. 목표를 향해 부지런히 위로 올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지점을 만나게 되지. 다른 봉우리를 올라가도 마찬가지야. 그 이상은 더 올라갈 수가 없어. 난 아마 이 그림의 남자처럼 한계를 크게 느꼈던 것 같아. 봉우리를 정복할 때마다 얻는 성취감은 컸지만 왜 그 봉우리에 가야 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했어. 그저 남들이 갔기 때문이었고 내가 그동안 습관적으로 가던 길이었을 뿐이었지. 나는 산을 올라가야 하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목적지를 뒤로한 채 그렇게 산을 내려와 익숙한 것들과 이별했고 낯선 방식의 삶을 시작했어.
하지만 생각보다 즐거운 일만 있지는 않았어. 퇴사하면 나를 구속하던 의무감들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것만 같았지. 하지만 명함을 버리고 난 후의 나는 보호막을 잃은 듯 무기력했고 더욱 강한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지. 하지만 고독과 불안은 현대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가지는 공통된 정서이기도 하다는 것을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을 보며 알게 되었어. 호퍼는 현대인의 고독과 불안을 많이 그렸어. 그의 그림 속에는 대부분 인물이 혼자 있거나 여러 사람들이 나오더라도 그들은 잘 소통하지 않는 모습으로 그려지곤 하지. <아침 해> 그림 속 여인은 창밖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어. 침구가 가지런하고 이불도 보이지가 않아. 뜬눈으로 밤을 보낸 것처럼 초췌한 몰골이 측은해 보이기까지 해. 방 안에서는 높은 절벽에서의 위태함은 없지만 세상과 단절된 소외감이 내려앉은 것 같아. 나 역시 저 여인처럼 아침 태양이 떠올랐지만 차마 나가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지독한 고독의 시간을 지나왔어.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나를 만나기 시작했지. 내가 무엇을 할 때 가장 행복한지, 내가 묻고 살아온 욕망은 무엇인지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며 나에 대해 사색했어. 아무것도 아니게 되자 비로소 내가 누군지 알게 되기 시작한 거야.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나아갔어.
새롭게 나아가는 길이 경이로웠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았어. 난 이 시간 동안 나의 약점도 많이 알게 되었어, 생각보다 많이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그리고 완전할 수 없다는 것도 받아들이게 되었어. 한 여인이 풀밭에 누워서 집을 바라보고 있는 앤드루 와이어스의 <크리스티나의 세계>를 소개해 주고 싶어. 집을 바라보면서도 가지 못하고 풀밭에 엎드려 있는 자세가 무기력과 절망감을 느끼게 하지. 그녀의 팔은 너무나 가늘어서 힘이 없어 보이고 연한 핑크색 드레스는 금방이라도 오염될 것만 같아. 그리고 그녀의 엉클어진 머리칼은 보이지 않는 그녀의 힘겨운 얼굴 표정을 대신 보여 주는 것만 같아. 저 그림 속 모델이 된 여인은 실제 다리가 불편하다고 해. 그런 그녀를 집 안에 있는 풍경으로만 그리다가 어느 날 그녀가 밖으로 나왔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작가는 담아 냈지. 어쩜 지금의 내 모습과도 닮아 있어.
친구야, 너무 안타까워하지 마. 나는 나에게 좀 더 가까이 가고 있는 중이니까. 처음에 그녀의 연약한 모습과 주변의 메마른 풍경을 보면 고독과 절망이 먼저 느껴져. 그렇지만 불안하게만 보이던 이 그림을 계속 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희망이라는 감정을 스멀스멀 올라왔어. 비록 그녀는 허약해 보이지만 풀에 베이고 넘어지고 긁히더라도 계속 나아갈 것만 같아. 성큼성큼은 아니더라도 조금씩 더디게 자신의 속도로 말이야.
내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나 역시 가고 있어. 목적지에 당도하지 못할지도 몰라. 대신 그러더라도 가는 그 길에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 생겼어. 조지 클로젠의 <들판의 작은 꽃> 속의 그녀처럼 말이야. 꽃을 발견한 그녀는 그 꽃을 두 손에 소중하게 안고 바라보고 있지. '추운 겨울을 이기고 다시 피어났구나! 온전히 너의 모습으로 피었구나! 장하구나! 장하구나!'라고 속삭이는 걸까? 나에게도 이런 일이 자주 생겼으면 좋겠어. 나만의 소중한 꽃을 발견하는 일 말이야.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을 알아가는 일 말이야.
내가 가는 길에 작을 들꽃 발견하며 기뻐하고 싶어.
내가 가는 길의 풀 냄새 맡으며 향기롭고 싶어.
내가 가는 길에 머리칼 간지럽히는 바람결을 느끼며 미소 짓고 싶어.
그렇게 난 익숙한 것들과 이별했고, 지금은 새로운 것들과 익숙해지고 있어. 목표가 아닌 과정을 즐기는 일 말이야. 그것은 저기 어딘가가 아닌 오늘 이 순간들을 사는 일이야. 지나온 시간들, 지금의 시간들, 그리고 앞으로 만날 시간들을 모두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말이지.
친구야,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계속 나를 응원해 주고 지켜봐 줘서 고마워.
넌 내가 가는 길에 만난 그 소중한 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