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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트북살롱 Oct 29. 2020

잘 지내나요, 그대

글: 나나


오랜만에 같이 점심을 먹던 친구와 대학시절 이야기를 하다 

'유독 기억에 남는, 가끔 생각나는 그때의 사랑이 있어?'라는 물음에 오랜만에 네가 떠올랐어. 

잘 지내고 있니?


이제는 까마득한 스물두 살. 돌이켜 보면 아직 어리디어린 나이에 만난 우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참 많은 꿈을 함께 꾸었지. 너는 나에게 더없이 충실했고, 어린 나는 그것이 사랑의 당연한 모양이라고 생각했었어.



좌: 밀턴 에이버리 <그리니치 마을 사람들>, 캔버스 유채, 1946, 106.68 x 76.2cm, G241-American Galleries / 우: 샐리 미셸 에이버리


사진을 좋아하던 둘은 엉뚱한 옷을 입고 별난 포즈를 하며 하루 만에 수백 장의 사진을 찍기도 했고, 어떤 날은 아무 말 없이 종일 햇볕 아래 앉아만 있어도 심심하지 않았지. 언제나 나를 향해있는 너의 카메라가 좋았고, 누군가의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담아낸 사진이었기에 가장 반짝반짝했지. 지금은 켜지지도 않을 옛날 노트북 어딘가에 꽁꽁 숨어 있겠지만 말이야.


그때의 우리는 흐릿하지만 또렷한 색으로 기억나는,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 1885-1965)의 <그리니치 마을 사람들>을 닮았던 것 같아. 미대에 들어간지 얼마 안 된 나는 오색찬란한 색의 레깅스를 종종 입었고, 너는 나의 엉뚱한 모양 스카프를 두르고, 우리 둘은 삼각대 앞에서 제일 잘 나가는 모델인양 포즈를 취했었잖아.


<그리니치 마을 사람들>을 그린 밀턴 에이버리는 미국의 마티스로 불리는데, 마크 로스코(Mark Rothko, 1903-1970)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작가야. 색면으로 조각내어진 그의 그림이 로스코에게 닿아 깊은 울림의 추상 표현을 만들어 내었듯이, 그때의 우리가 채운 시간의 조각들이 지금의 나를 이루는 건 아닐까.


기억 속 우리는 밀턴의 부인, 샐리 에이버리가 그린 <연인>의 빛나는 노란색과도 닮았어. 어린 나이에 온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역경의 흔적을 한 올도 찾아볼 수 없는 밀턴 에이버리의 그림처럼. 그리고 그런 남편을 똑 닮은 그녀의 따뜻한 그림처럼. 서로 날 선 말로 할퀴었던 순간이 분명히 있었을 테지만, 기억 속의 우리는 마냥 밝은 황금빛이야. 어쩌면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기에 그때의 우리가 더욱 찬란한 색으로 기억되는지도 모르지.


그날 친구가 내게

'왜 다시 연락하지 않았어?' 하고 묻더라고.


나는 그랬어.


"아마도 우리가 오래 떨어져 자란 시간만큼이나 서로가 내 기억과는 다른 어른으로 자랐겠지. 초콜릿 같아. 먹은 초콜릿은 다 뱃살로 가잖아, 절대 안 없어지는. 그냥 먹어 버린 초콜릿처럼. 그냥 그렇게 사라져서 내 일부가 되어 버린 건가 봐." 그렇게 내 몸에 일부가 되어버린 당분처럼. 너라는 사람은 사라지고 이제는 그 달달했던 기억만 남아 어디엔가 계속 웅크리고 있나 봐.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 <무제(로스의 초상)> 1922


펠릭스 곤살레스-토레스(Felix Gonzalez-Torres, 1957-1996)도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게 아닐까?


그는 전시장에 에이즈로 먼저 세상을 떠난 연인 로스의 몸무게인 175파운드(79.3kg)의 사탕을 쏟아 놓았어. 전시장에 온 관람객들은 자유롭게 사탕을 집어 갈 수 있는데, 그럼 다시 로스의 몸무게에 맞추어 사탕을 다시 채워놓는다고 해. 아마도 관람객이 삼켜 그들에게 스며든 사탕들처럼 로스가 오래도록 세상에 구석구석 남아 있길 바랐나 봐.


누군가는 사랑을 꽃에 비유하기도 하지만, 나는 사랑이 꼭 이 사탕 같아. 순식간에 입에서 녹아 버렸지만 어딘가 구석진 내 몸 어딘가를 이룰 사탕처럼, 우리의 이야기였지만 결국 그 경험들이 내가 자라나는 과정이지 않았을까.


자꾸만 줄어드는 곤살레스-토레스의 전시장 사탕처럼 기억도 점점 작아질 테지. 그리고 어디선가 우리는 각자 또다시 봄 같은 사랑을 하고 있을 테지. 하지만 녹아들어 몸에 스민 사탕처럼, 또는 입안에 맴도는 옅은 사탕 향기처럼. 어렴풋이 남아 있는 어린 추억에 어느 하루는 잔잔히 미소 짓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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