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세잎클로버
이 그림은 자크 루이 다비드의 <아킬레우스의 분노>입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19세기의 프랑스 화단을 지배한 고전주의 화가입니다. 세련된 선으로 고대 그리스 조각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대작을 그렸죠. 화가는 그리스 로마 신화의 사건들을 많이 그렸는데, 이 작품도 그 중 하나입니다.
그림을 보시면, 가운데에 흰 옷을 입은, 힘없이 고개를 떨군 젊은 여인이 보입니다. 왼쪽 옆에는 울고 있는 여인이 보이죠. 맨 오른쪽의 무표정한 남자를 바라보며 맨 왼쪽의 등을 보인 남자가 칼을 뽑아 들고 있습니다. 칼을 뽑아 드는 사람은 그리스의 용맹한 장군인 아킬레우스이며, 그가 분노를 드러내는 맨 오른쪽 남자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에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을 맡은 아가멤논입니다. 가운데의 여인은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이며, 우는 여인은 아가멤논의 아내인 클레타임네스트라입니다.
이 그림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아가멤논은 대규모의 그리스군을 소집하여 출정을 앞두고 있었는데, 트로이로 가야 할 배가 역풍에 막혀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노했기 때문이며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쳐야 그 노여움이 풀릴 것이라는 신탁이 내려옵니다. 그리스군을 책임진 아가멤논은 이 말을 거역하지 못하고, 딸을 제물로 바치기로 하죠. 그래서 이피게네이아를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겠다는 거짓말로 두 여인을 불러 온 것입니다. 아킬레우스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이름이 사용된 것에 분노했고, 죄 없는 사람이 희생되는 것에 분노했으며, 딸을 희생시키는 아버지의 비정함에 분노했습니다.
이처럼 ‘분노’라는 감정은 부당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인터넷 등에서 부당한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고 들을 때 분노를 하는 기저에는 ‘공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분노는 현실의 벽 앞에 맥없이 스러져 버릴 때가 많습니다. 아킬레우스의 분노도 그렇습니다. 칼을 뽑아 아가멤논을 죽인다 한들, 저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아마 아킬레우스는 분노하면서도 칼을 놓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좌절했을 것입니다. 부당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이득을 생각해야 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을 테지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 외면하면서요.
하지만 이런 분노가 현실의 벽을 넘을 때가 있습니다. 자신의 분노가 뚜렷한 공감과 명분을얻을 때, 분노에 몸을 맡기는 것이 정당함을 모두 인식할 때, 그래서 자신에게 희생이 따르더라도 감내할 수 있을 때, 분노는 뜨거운 들불처럼 일어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하면서도 왕정을 무너뜨리고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공화국을 세운 프랑스 혁명처럼, 역사의 거대한 물줄기마저 바꾸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렇게 분노는 단순히 화내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성취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무엇에 분노하는가? 삶의 무게에 눌려 분노할 것에도 눈 감고 살지는 않는가? 나의분노가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무력해지더라도, 그 무력감을 느끼는 것이 나를 인간으로 살게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렇게 분노를 느끼며 현실의 벽을 깨 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었으면, 그래서 뜨겁게 살았으면,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부끄럽게 여기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