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진남(純眞男)의 잔인한 상경기

by EUNJIN


K가 서울에 왔다. 짝사랑하던 여자가 떠난 지 6개월쯤 됐을 때였다. 태어나 줄곧 지방의 소도시에서 살았던 K는 한 번도 고향을 떠나 살게 되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더군다나 아는 이도, 아는 곳도 전무하던 그에게 서울은 멀고 낯선 땅이기만 했는데 그런 그를 자극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6개월 전 서울로 떠나간 여자였다. 그녀 옆에, 그녀 가까운 곳에만 있다면 그녀와의 사랑이 결실 맺으리라 믿었던 것이다. 키 187의 거구였던 K는 바짝 깎은 스포츠머리에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곱지 않은 피부에 투박한 사투리까지 썼지만 알고 보면 더없이 순진하고 계산이 없는 남자였다. 그는 약속되지 않은 여자 하나를 목표로 삶이 축이 바뀌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는 남자였다. 사는 곳이 어디든, 하는 일이 무엇이든,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고 오로지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전속력으로 달릴 수 있는 뚝심 있는 사나이였다.


하루하루 애타는 그를 도운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고교 동창 J였다. 4년 만에 연락이 된 J는 자신이 일하는 곳에 일자리가 있고 숙소도 제공하며 그곳은 서울이라고 말했다. 와서 같이 지내며 일하자고 K를 설득했다. 사실, 설득은 필요하지 않았다. 상경의 명목과 당장의 거처가 절실했던 K에게 J의 제안은 쩍쩍 갈라진 논에 쏟아지는 비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재고 망설일 것이 없었다. 당장에 짐을 싸고, 부모님께 인사를 남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스무 살의 마음으로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순진했던 이 남자는 서울에 도착해 급한 대로 낡은 여관에 짐을 풀었다. 오래된 동네의 고가 밑에 있던 지저분한 여관은 대실과 달방을 주 수입원으로 하는 곳이었다. 외따로 떨어져 한적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곳은 고가 위에서 바라보면 외로운 섬처럼 저 혼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어둡고 낯선 거리를 걸어 여관에 들어선 후에야 K는 마침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서울에 왔다고. 서울에 직장을 구했다고. 만나고 싶다고.


갑작스러운 K의 상경 소식에 화들짝 놀란 여자는 길 잃은 어린아이를 영영 잃어버리기라도 할세라 조바심 내며 그의 여관이 있는 동네로 갔다. 어둡고 외로운 여관을 벗어나 빛을 찾아 더듬더듬 걸어 나온 K를 보자 그녀의 가슴속에는 싸한 연민이 일었다.

이 안타까운 남자를 보게. 이 순진한 남자를 보게. 이 바보 같은 남자를 보게...



7-10.jpg < 출처 : 블로그_동그라미생각 >



지갑이 가난했던 둘은 길 밖으로 김이 폴폴 나는 떡볶이 집으로 들어갔다.

김밥 한 줄과, 떡볶이 1인분과 어묵 꼬치 2개를 시켰다.

긴 시간 배를 곯았던 K와 졸였던 마음이 풀어지며 급하게 허기를 느낀 그녀는 서둘러 떡볶이를 집어 입에 물었다.


세상에! 아직도 1인분에 500원짜리 떡볶이가 있다니.

그런데 더 세상에! 이 미끄덩거리며 쫀득한 밀떡의 슴슴한 듯 아찔한 맛이라니.


돌이켜보면 그 날의 그 떡볶이는 둘의 재회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뜨겁고 빛나는 연인의 사랑은 아니었지만 아련하고 은은한 인간의 애정 같은 뭐 그런.


그 후로도 둘은 그 떡볶이 집이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을 더 찾아갔었다고 했다. 그 묘한 맛에 중독되어 다른 집은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어느 날 그 집이 사라져 버렸을 때, 그녀는 심한 허탈감과 슬픔을 느꼈다고 했다.




며칠 뒤, K는 J를 만났다.

J는 그를 어느 지하 사무실로 데려갔다. 그가 그곳에 들어서자 등 뒤로 차가운 철문이 철커덩하고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그 안에는 하얀 셔츠에 잿빛이거나 검정이거나 감색인 정장을 입은 여러 명의 여자와 여러 명의 남자가 있었다. 러시안 인형처럼 같은 옷에 같은 표정을 한 그들은 몇몇은 벽을 둘러 서 있고 몇몇은 의자 사이사이에 서 있었으며 몇몇은 이쪽저쪽으로 걸어 다녔다.

어색하게 들어선 K는 제대로 된 인사나 소개도 없이 하얀 보드판과 하얀 벽뿐인 방에서 몇 시간 동안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들어야 했다. 그들은 그것을 교육이라 했고 하얀 셔츠에 잿빛이거나 검정이거나 감색인 정장을 입은 러시안 인형들은 교육생들 옆에 서서 모자란 설명을 더하며 온기 없는 미소를 보태고 있었다. 그들 안에 K의 친구 J도 있었다.


그제야 K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서 일어나자 두 명의 남자 러시안 인형이 다가와 K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놀란 K는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문 쪽으로 걸어갔다. 러시안 인형들이 달려들어 양쪽에서 팔을 잡고 K를 잡아당겼다. 철커덩 쇳소리를 내며 닫혔던 문은 잠겨있었고 K는 그보다 더한 소리를 내며 거칠게 문을 흔들었다. 그 새 설득하는 인형과 윽박지르는 인형과 협박하는 인형과 힘을 쓰는 인형이 다가왔다. 그리고 거기에 친구 J가 소리 없이 서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마동석의 체형과 마동석의 인상을 가진 K는 그때 짐승처럼 울부짖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기세에 눌린 그들이 K를 놓아준 것인지 놓친 것인지 K는 찰나의 틈을 열고 계단을 뛰어올랐고, 내려다본 그곳에 러시안 인형들이 넋을 잃은 채 서 있었다. 그들은 회색의 철문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밤이 되어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둡고 외로운 여관방에서 며칠을 잠들었던 K는 고아가 된 심정으로 그녀를 만나 500원짜리 떡볶이를 먹으며 그 날의 일을 얘기했다. 그녀는 가슴을 치면서 분노했고 몇 천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듯 온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보아온 세상이 손바닥만 했던 탓에 물정에 어두웠던 사내, 세상 모든 이의 마음이 제 마음과 같다고 여기며 ‘친구’라는 타이틀을 올곧게 믿었던 사내, 그래서 받은 대가가 너무 컸던 바보 같은 사내였다.


K는 J를 다시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물어보겠다고 했다.

J가 정한 약속 장소는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밤새 음악이 쿵쾅거리며 불빛이 번쩍이는 시내 한복판이었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기가 죽은 K를 그녀가 동행했다.

기다리고 있던 둘의 눈에 J와 꼬옥 붙어 팔짱을 끼고 걸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회색 철문 안에서 보았던 여자였다. 그 둘은 연인이었고 같은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인형들이었다.

참고 있던 분노가 번개탄처럼 화르륵 피어올랐다.

K가 나서기도 전이었다. 그녀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리고는 마디마디 배신감과 분노를 담아 매운 손바닥을 J의 뺨에 올려 부쳤다. 짝-!

그녀의 순간적인 행동에 시끌시끌하던 시내 한복판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그리곤 곧 K와 그녀와 J와 J의 여자를 무대 위에 올려놓은 것처럼 빙 둘러 둥그렇게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에게 뺨을 맞은 J는 체념한 듯 이내 고개를 숙였고,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오던 여자는 꽥꽥 소리를 지르며 파르르 덤벼들었다.


그 이후의 일들은 뭐 그랬다.

제 일도 아닌 일에 분노했던 그녀는 마치 밖에서 맞고 돌아온 아이의 엄마처럼 흥분하여 J를 향해 인간의 도리와 친구와 우정, 사기, 다단계.... 뭐 그런 것들을 따지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옆에서 꽥꽥거리던 여자에게는 입을 닥치라고 경고했다. 말 한마디 보탤 틈 없던 K는 엄마 옆에 서있는 아이처럼 주저했고 한마디 대꾸도 못하던 J는 사람 없는 빈 바닥만 쳐다보았다. 제 편 하나 없는 상황에 잔뜩 독이 오른 J의 애인은 말하는 족족 그녀에게 힘을 못 쓰고 쏘이자 급기야는 제 남자 친구의 손을 낚아채 몰려있던 사람들 틈을 비집고 잽싸게 도망을 쳐버렸다.

일방적으로 욕먹고 뺨 맞던 두 사람과 일방적으로 욕하고 악 쓰던 한 여자를 신기하고 재미나게 보고 있던 구경꾼들은 주인공들이 사라지자 이내 하나 둘 흩어졌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난 괘씸함에 아직도 악이 풀리지 않았던 그녀는 두 사람을 찾겠다고 씩씩거렸지만 즐비하게 늘어선 카페와 술집과 식당과 상가들 속으로 숨어버린 그들을 다시 찾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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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K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뒤 스스로의 힘으로 일자리를 구해 다시 상경했다.

이번에는 여관이 아니라 고시원을 구했고, 두 달 뒤 고시원보다는 나은 지하 월세방으로 옮기며 두 달치 월급을 모은 돈으로 125cc 중고 오토바이를 샀다. 오토바이를 타고 출퇴근을 하며 2년을 더 서울에 살았지만 그녀는 한 번도 그 오토바이에 타지 않았고, K는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마음을 얻지 못했다.


나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그날 밤, K는 눈물을 삼키고 주먹을 쳤으며 다음 날 사표를 쓰고 오토바이를 팔았다. 그리고 며칠 후 영영 고향으로 돌아갔다.


K에게 서울은 그녀였으며 그녀가 없는 서울은 의미가 없었다.

그녀도, 서울도, K에게는 끝끝내 짝사랑이었으며 외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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