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바닷가가 멀지 않은 남쪽의 작은 도시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금이야 ‘시’로 승격이 되었지만 내가 자랄 때 그곳은 ‘군’이었고 ‘읍’이었다. 그곳에는 시내버스가 존재하지 않았고, 길에서는 택시를 볼 수 없었다. 버스는 버스정류장에 모여 있다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시외로 사람을 날랐고 택시는 택시정류장에 모여 있다가 버스가 가지 않는 ‘리’ 나 ‘면’ 혹은 어쩌다 시외로 나가는 외지인과 급한 손님을 모셨다. 초등학교 때는 30~40분을 걸어 친구네 집으로 놀러 다녔고, 초록 잡풀과 소똥이 가득한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며 놀다가 더러워진 엉덩이를 신나게 흔들며 다시 30~40분을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 땅에는 같은 장소를 기억하고 같은 추억을 공유하며 같은 시간을 보낸 이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익숙함이며 안정감과 안도감이었다. 또한 그리움이며 풍요로움이며 따뜻함이었다.
조선시대 초 10만 명에서 시작된 서울 인구는 8.15 광복, 6.25 전쟁을 거치며 조금씩 늘어나다가 경제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60년대를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러다 드디어 1988년, 1028만 6503명으로 서울은 인구 1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변모하였다.
면적은 전국의 0.61%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전국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4명 중 1명이 서울 사람인 셈이다. <출처_두산백과>
서울에 주소를 두고 산지 올해로 꼭 18년이 되었다. 나에게 서울은 꿈을 찾아 떠나온 동경의 도시였고, 그곳에서만 가질 수 있는 기회의 땅이었다. 여기에서 나의 어른의 삶이 시작되었고, 뜨겁고도 차가운 사회생활 또한 시작되었다.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은 내 유년의 땅에서 만난 사람과 달랐다. 이곳은 전국의 수많은 ‘군’과 ‘시’와 ‘읍’과 ‘면’과 ‘리’에서 올라온 이들이 모여 만든 선택의 도시였다.
그들에게는 모두 각자의 기억과 각자의 추억과 각자의 시간이 존재했다. 그것은 모두 다른 정서와 언어를 만들어내었다. 제 나름의 것들을 간직한 이들은 대하는 법도 모두 달라야 했다. 나는 그것을 방송국에서 만난 이들에게서 배웠다.
각자의 전문 분야에 있는 사람들이 모여 하나의 팀이 구성되는 방송시스템은 스텝 개인의 영역이 분명하고 프라이드도 무척 높았다. 누구도 함부로 침범하거나 침범당할 수 없었다. 한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적어도 몇십 명의 스텝이 구성되는데 짧게는 2~3달에서 길게는 1년 이상을 함께하기도 한다. 방송 기간 내내 그 모두와 일적으로나 사적으로나 트러블 없이 협업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 습득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PD로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정서로 살아온 이들의 언어를 모조리 이해하고 그것이 만들어내는 몸짓과 표정을 읽으며 그것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 그러면서 동시에 질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매 순간 결정과 책임의 위치에서 언제나 그것이 최선인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 뭐 그런 것이었다.
내가 방송 경력 4-5년쯤 되었을 때 만난 카메라 감독은 경력이 20년 가까이 되신 베테랑 감독이었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나를 보면 언제나 자신의 교회로 전도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조용히 나를 매점으로 불러서는 버럭! 하고 불 같이 화를 내셨다. 좀처럼 그렇게 정색하는 법이 없었고 당시 그와 나 사이에 특별한 사건도 없었기에 나는 무척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긴 말을 삼키고 당신의 불쾌함만을 강조하는 그 앞에서 이유도 모른 채 사과와 훈계와 침묵의 시간이 지나갔는데 나는 아직도 그가 나에게 화를 낸 이유가 무엇인지, 그것이 공적인 이유인지 사적인 이유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다만 “그러면 안 된다. 그렇게 웃으면 안 된다...”라는 말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그때 나는, 웃는 것에도 각자의 언어가 존재한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후로 나는 그분 앞에서 잘 웃지 못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웃음을 계산하게 되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떤 소리로, 어떤 표정으로 웃어야 하는지 그래야 오해하지 않는지, 그래야 심플한지, 그래야 세련된 것인지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내 방식은 가끔 그들에게 서투르게 느껴졌고 나 또한 그들이 종종 낯설었다. 서울 사람이 아닌 서울 사람으로 사는 우리는 모두 다른 언어를 쓰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는 통역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서로 부대끼고 상처를 내면서 제 나름의 방식으로 ‘서울의 말’을 배워갔는지도 모르겠다.
서울-人 아닌 이가 서울-IN 하기 위해 모여드는 곳.
빈 곳 하나 없이 인구 1/4이 다닥다닥 붙어사는 기대와 기회의 땅.
각자의 어미와 각자의 고향을 가진 이들이 모여 만든 인구 1000만의 거대 도시.
오늘도 수많은 이가 저마다의 이유로 서울행 버스에 오르고 그보다 더 많은 이가 모태의 언어와 다른 ‘서울의 언어’를 배우며 서울의 힘에 기대어 살아간다. 그들이 뿜어내는 숨과 흘리는 땀으로 공기와 온도를 만들며 그렇게 서울의 낮과 밤이 돌아간다.
이제 이 곳은 내 아이들의 고향이 되었고 나와 내 가족이 계속해서 삶을 이어나갈 터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