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에서 만난 男子

그해 겨울, 신촌

by EUNJIN


그 해 겨울은 이상했다. 유난히 길었고 유난히 추웠고 유난히 아팠다.

오랜 타지 생활, 불규칙한 직장생활, 지긋지긋한 인간관계, 방향 잃은 꿈과 이상,...

뭐 그런 것들로 흔들흔들 발걸음이 늘어질 때였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낯익은 사투리에 깜짝 놀랐다가 이내 시니컬해졌다.


'아... 경상도 남자랬지.'


일주일에 삼일은 출장을 가고 촬영을 하고 이틀은 편집을 하고 나머지 이틀은 후반 작업을 했다. 그리고 다시 삼일은 출장을 가고 촬영을 하고 이틀은 편집을 하고 나머지 이틀은 후반 작업을 하는 생활이 두 달째였다. 쉬어야 했지만 쉴 수 없었다. 내겐 쉴 수 있는 자유도 시간도 없었다.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돌아와 잔뜩 쌓인 테이프들을 방송국에 밀어놓고 유령처럼 기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때의 내 모습은 마치 주인 없는 그림자 같았을 것이다. 개지도 못한 이불에 벗지도 못한 몸을 누이고 시체처럼 잠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때 그 전화가 울렸다.


2월 1일 신촌 현대백화점 앞 6:30분

그것이 우리의 첫 약속이었다.

내가 6시 18분쯤 백화점 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30분째 그 앞에서 떨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아직 그날 내가 입었던 검은색 터틀넥과 붉은 립스틱을 기억하고 나는 그가 입었던 베이지색 점퍼와 오들오들 웅크리고 서 있던 굽은 등을 기억한다.


그날은 긴장 없이 기대 없이 목적 없이 그를 만나 뜨거운 라떼 한 잔에 예의를 갖추고 낙지 찜 한 젓가락에 친구가 되고 낡은 주점 흐린 백열등 아래 동동주 한 사발 기울이며 인연이 될 것을 예감한 그런 날이었다.


메마르고 뿌옇던 서울생활, 1미터 앞만 보고 내딛던 젖은 걸음은 그와 부딪히며 10미터 앞, 100미터 앞을 보게 되었고 바삭바삭 10월 말 낙엽 같던 내 심장은 조금씩 물기를 머금고, 언 땅을 비집고 돋아나는 초록 것들처럼 순리대로 찬찬히 봄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한 발씩 한 발씩 그에게로 가서 앉았다가 기댔다가 엎드렸다가 누웠다가 잠들었다... 쉬었다.


만약 그날,

차분하고 조용했던 그 남자가, 조금씩 더 크고 환하게 웃어주지 않았더라면,

소심한 발걸음으로 술 한 잔 더 하지 않겠느냐고 말꼬리를 늘이지 않았더라면,

취기 오른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겠노라고 날래게 택시에 올라타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서울 반대편으로 돌아가 새벽 네 시까지 메신저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아마도

우리의 지금은 없었을 것이다.

같이 숨을 나누는 이 방과, 같이 밥을 나누는 이 식탁과, 같이 생을 나누는 이 아이와, 같이 걸어가는 이 삶 같은 것 말이다.

10년 넘게 살아온 이곳에서 여전히 이방인처럼 비틀거리며 무엇 하나 얻은 것이 없다고, 내 것 하나 남아있지 않다고, 허무하고 허망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2004.02.01 >



그 해 겨울, 나에게는 그와의 날들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신촌의 낯선 카페와 그 맛이 변태같이 맵다 하던 홍대의 낙지 찜,

시조가락처럼 기다란 이름의 허름한 주점과 그 아래 노을 지던 붉은 등이 있었다.


술 취한 생일 밤의 서투른 첫 키스와 처음 맞는 밸런타인데이의 반짝이는 페라로 로쉐.


얼어 죽을 것처럼 찬바람이 불던 남이섬,

손 한번 잡아줄 줄 모르던 연애 바보 남자와 내색하지 못하고 휑한 섬만 거닐던 우리의 청춘이 있었다.


바리바리 싸들고 갔던 3단 도시락을 들고 굽이굽이 찾아 간 춘천의 낡은 비디오 방,

여전히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한 채 꾸벅 잠이 든 그와 멋쩍게 혼자 보던 '냉정과 열정 사이'도 있었다.


함박눈이 내리던 3월의 홍대, 하아얀 눈꽃이 되어버린 분홍색 꽃다발을 들고

뚜벅뚜벅 발자국을 만들며 내게로 와 그 눈 보다 더 하얗게 웃어주던 남자.

매운맛을 좋아하던 나를 위해 어울리지 않는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불닭 집 뒤로 길게 줄을 서던 매운 것을 못 먹는 남자.

서툴지만 풋풋하고 세련되진 않지만 매 순간 정성스럽던 그 남자.


그렇게 타인의 도시 서울은 온 기운을 몰아

그를 나에게로 이끌어준 것이다.

그해 겨울, 신촌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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