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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IN Jun 06. 2023

#. 장면들



#1.


AM 8:30 - 9:30



아이들이 먹다 두고 간 그릇을 정리해 싱크대에 넣습니다.

식탁을 싹싹 닦고 바닥에 떨어진 빵가루와 밥풀도 닦습니다.

남은 음식을 정리해 넣으며 냉장고 속 식재료들을 챙겨보고, 저녁에 사서 들어와야 할게 무얼까 생각합니다.

왔다 가는 동선에 어질러진 소형 가전이며 책들, 또 미처 제자리로 들어가지 못한 그릇들을 정돈합니다.

싱크대 속, 몇 개 없는 그릇을 후다닥 씻어 엎어 놓습니다.

몇 개 없을 땐 쉬우나 그릇이 쌓이면 설거지가 더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서는데 발아래 까만 머리카락들이 자꾸만 눈에 들어옵니다.

거슬립니다. 눈 끝에, 발 끝에 온 세포가 몰린 듯합니다.


참을까?

아니야. 거슬려.

10분이면 돼.


재빠르게 청소기를 꺼내어 배터리를 끼우고 주방부터 차근차근 밀고 옵니다.

위이이잉- 한 톨의 먼지도 허락할 수 없다는 듯이, 전투적이기까지 합니다.

온 집안을 깨끗이 쓸고 나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습니다.


됐다. 이제 그만.

여기까지만.


집안일은 하자고 들면 끝이 없습니다.

하나를 하고 나면 두 개가 보이고, 두 개가 보이면 세 개째가 눈에 들어오고

그렇게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다 보면 하루 종일 집안일만 하게 됩니다.

하루를 통으로 집안 일로 보내고 나면 사실, 오랜만에 목욕탕에 간 듯 개운은 하지만

또 그렇게 허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눈을 감고, 하고픈 마음도 참아야 합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해봅니다.

일단, 유산균을 하나 따서 입 안에 털어 넣고, 프로폴리스와 오메가 3와 비타민을 먹습니다.

주전자에 물을 끓이고, 텀블러를 꺼내어 그 위에 드리퍼와 여과지를 올리고 갈아놓은 원두를 넣습니다.

칫솔을 입에 문 채, 샤워기를 틀어 물 온도를 맞춥니다.

야무지게 머리를 감고 탈탈 털어 수건으로 닦은 다음, 바닥에 흐트러진 머리카락들을 사악- 긁어모읍니다.

그것을 화장지에 둘둘 말아 휴지통에 버리고 나와 한 김 식은 뜨거운 물을 원두 위에 내립니다.

거품이 뽀글 올라 부풀면 쪼르르 화장대로 달려가서 화장을 시작합니다.


아. 잊은 것이 있네요.

핸드폰을 들어 멜론앱을 엽니다.

새 음악을 고를 새가 없어 플레이리스트에 있던 음악을 그대로 플레이합니다.

주방과 화장대를 서너 번 왔다 갔다 하며 커피를 부실하게 내립니다.

아침은 대체로 이렇게 분주하고 부산합니다.






#2.


AM 9:30 - 10:15



기초화장이 끝나고 선크림까지 발랐습니다.

이제 베이스와 색조 화장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바꾼 콘택트렌즈는 아무래도 좌우가 바뀐 건지 멀리는 잘 보이는데 가까이는 도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이전 거는 멀리가 안 보이고 가까이가 잘 보였는데, 대체 뭐가 맞는 건지, 뭐가 나은건지.

내 눈이 문제인지, 렌즈가 문제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조만간 렌즈를 들고 안경점을 다녀와야겠다 생각합니다.


얼굴 전체에 쿠션 팩트를 바르고, 윤곽을 따라 살짝 음영도 주고, 눈썹을 정리해서 색을 입힙니다.

헤어 에센스를 꺼내어 찹찹 손바닥에 덜어 문지르고 그걸 다시 젖은 머리에 슥슥 바릅니다.

드라이기를 꺼내어 온도를 올리고 머리카락을 뒤집어 두피를 말립니다.

머리카락이 긴 것은 참 번거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짧은 것은 더 번거로운 일이었기에 긴 머리를 고수합니다.

언제까지 긴 머리일 수 있을까.

나이가 드는 건 긴 머리를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일까? 하고 가끔 생각합니다.

뒤집은 머리카락을 똑바로 하고 또 다른 에센스를 꺼내어 다시 찹찹 손바닥에 덜어 문지르고

그걸 다시 머리에 슥슥 바릅니다.


뷰러로 속눈썹을 집어 올리고, 브러시를 꺼내어 오른손에, 아이섀도를 꺼내어 왼손에 듭니다.

침대 위에 던져 놓은 핸드폰에서는 익숙한 음악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게, 흐르는지 멈춘지도 모르게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진 속 배경지처럼 비어있는 나머지 공간 전체를 제 색깔로 채웁니다.

브러시를 들어 오른쪽 눈두덩이에 바릅니다.

네 번째 손가락으로 그 바른 아이섀도를 문질러 자연스럽게 만듭니다.

이제 왼쪽입니다.

.

.

.


고개를 돌립니다.

침대로 걸어갑니다.

서너 걸음뿐인 그 거리를 느리게 느리게.

그리고 털썩.

침대 위에 주저앉습니다.


눈물이 흐릅니다.

나는 그저 가만히 있는데 뺨을 타고 두 줄의 물기가 턱 끝까지 흘러내립니다.

그러다 그것은 점점 흐느낌이 되어버리고

흐느낌은 다시...

주체할 수 없는 엉엉거림이 됩니다.

목 놓아 운다는 말이 이런 건가요?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만 악을 쓰고 있습니다.


악을 쓰며 울어본 적이 나에게 있었던가...

있었다면 그게 언제였을까...

언제였다면 왜였을까...

나는 지금 왜 이렇게 악을 써대며 울고 있는 것일까...


멈출 수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멈출 수가 없다고.

안된다고.

울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멈출 수가 없고, 안되어서

나는 더욱 목 놓아 울어버립니다.


시간도 공간도 분리가 되어버린 듯합니다.

진공 속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나도 더 이상 내가 아닙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음악만이 제 갈 길을 부지런히 가고 있습니다.






#3.


AM 10:15 - 10:40



지워진 화장을 다시 합니다.

경계가 생겨버린 볼을 문질러 경계를 없애고 그 위에 쿠션 팩트를 다시 바릅니다.

정성을 들일 마음은 이미 없습니다. 그냥 흉측한 것만 지우자 싶습니다.

눈두덩이도 아무래도 다시 발라야 할 모양이네요.

솔질을 하는데 다시 흐느낌이 밀려 올라옵니다.

흑... 흑...


하...

안돼...

그만하자. 그만.


나를 다독입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큰 숨을 한 번 내쉬고 화장을 마무리합니다.

옷을 챙겨 입고 향수를 뿌리고 가방을 메고 현관을 나섭니다.


나는 다시 내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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