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심심해서 해 보는 생각을 심심하게 써 보는 글로, 퇴고 없는 일필휘지의 글입니다.
고로 다소 산만하고 조잡할 수 있으며 상당량의 TMI가 포함되어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커피와 술과 글과 음악을 사랑합니다.
꽤 오랜 시간 그것들을 사랑해 왔습니다.
3. 글
<읽는 글>
우선 부끄럽게도 다독을 하는 편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자가 글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것은 엉덩이가 앞에 붙고 가슴이 뒤에 붙은 것처럼 말도 글도 뭣도 아닌 거란 걸 압니다. 다독과 속독은 늘 꿈꾸는 희망사항이지만 애초에 정신의 속도가 빠르지 못하여 한 세계로 들어가는데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한 책을 깊게 읽는 편이고 한 작품에 빠지면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찾아보는 편입니다. 그건 책이어도 그렇고 드라마여도 그러며 영화여도 그렇고 음악이어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작가에 대해 알아갑니다. 작가의 작품이기도 하고 작가의 인생이기도 합니다. 어차피 예술이란 작가의 영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니 창작자가 어떤 궤적으로 어떤 세계를 살았는지 아는 것은 그 작품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별거 아닌 것 같은 것에도 그의 역사와 서사가 더해져 의미를 갖는 것들을 종종 보기도 했습니다. 그건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상일까요? 실존일까요?)
책은 보통 여러 권을 동시에 읽습니다. 침대에서 보는 책, 화장실에서 보는 책, 식탁에서 보는 책, 도서관에서 보는 책, 카페에서 보는 책이 모두 다릅니다.
현실이 빠듯하여 외면하고 싶을 땐 소설을 읽고 정신적 영감을 얻고 싶을 땐 시를 읽습니다. 시간을 단단히 보내고 싶을 땐 수필을 읽고 본질에 다가가고 싶을 땐 심리서나 철학서를 읽으며 몸과 마음에 환기가 필요할 땐 그림책을 봅니다.
자기 계발서는 잘 보지 않습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계발'되지도, '개발'되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시간에 진짜의 나를 '개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도달했습니다. 만화는 애써 봐도 흥미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랬습니다. 상상의 영역을 이미 다 제시했기 때문이라고 내 나름대로는 감히 결론을 내렸습니다.
가르치는 글보다는 느끼는 글이 좋습니다. 성격이 나긋나긋하지 못하여 저자가 결론을 내려놓고 가르치려 드는 글은 거부감이 듭니다. 모든 예술이 창작자의 손에서 떠나면 더 이상 그이가 관여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소비하는 사람의 역사와 상황과 심리를 더해 새로운 예술이 되는 것이라고, 그러니 감독이나 작가나 음악가에게 작품의 의도를 묻는 것은 궁금할 순 있겠지만 그들의 답이 애초에 규정된 정답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의미로 작품을 보고 감상평을 여럿이 나누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나 그것이 글일 경우엔 더욱 그러합니다. 나의 경험의 부족일지도 모르겠으나 글 쓰는 사람들이 글을 읽을 때 보이는 은근한 우월 의식이 불편합니다. 다수와 다른 것을 느꼈을 때 보이는 은밀하고도 교묘한 따가움, 따돌림. 그것은 폭력적이었으며 나의 세계를 더 편협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극복해내고 싶은 경험입니다만 시도해 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쓰는 글>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글을 써야 하는지도 아직은 어둡습니다. 써야만 한다는 결론은 아주 오래전에 내렸지만 사는 데 이유가 많고 변명이 많아 쓰지 못한 날이 더 많습니다. 그 핑계를 하나만 접고 그 시간에 집중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지금의 나보다 더 고운 글을 쓰는 사람이 되어있었을 것입니다. 아깝고 안타깝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다 잘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좋아하는 글은 잘 쓰고 싶다고 여깁니다. 잘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으나 나는 다만 내 글이 누군가에게 가르침이 아니라 흔들림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흔들리는 그곳이 머리든 가슴이든 배꼽 아래든 상관없습니다.
흔들림이 되려면 솔직해져야 합니다. 거짓은 힘이 없습니다. 가짜는 티가 납니다. 진실이 통하지 않는 이에게 거짓이 통할 리 만무합니다. 그러나 나는 종종 글 속에 숨습니다. 나만이 보는 글 안에서도 나는 숨바꼭질을 합니다. 단어 속에 집을 짓고 문장 속에 미로를 만듭니다. 어쩌면 숨기 위해 글을 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라는 장치를 뒤집어쓰고 아닌 척 그런 척 교묘하게 나를 드러내고 싶은 이중성.
겹겹의 겨울을 벗고 여름으로 가야 합니다. 어디까지 벗을 수 있을까. 이렇게까지 벗어야 할까. 내가 이렇게 발가벗으면 내 주변은 괜찮은 걸까... 하는 고민을 언제나 합니다. 이것은 어쩌면 모든 쓰는 이의 고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완전히 벗어야 나의 언어가 누군가에게 온전히 가 닿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커피 프린스 1호점' 보다는 '나의 아저씨'에 주저앉는 사람입니다. (미안합니다. 화사한 드라마를 잘 안보다 보니 예시로 들것이 2007년도 드라마 뿐이네요.)
빛나는 것들은 다른 분들이 쓰세요. 빛나는 당신처럼 빛나는 이야기를 써서 그늘 위로 나누어 주세요.
저는 반짝이지 않는 것들을 쓰려합니다. 빛나야 하고 반짝여야 하고 파이팅 해야 하고 힘내야 하고 잘 지내야 하고 버텨야 하고 견뎌야 하고 그런 거. 꼭 그래야 할까 싶어서요. 그건 다른 분들이 해도 될 거 같아서요.
빛을 잃었을 때도 불투명할 때도 싸움에서 졌을 때도 힘이 없을 때도 잘 지내지 못했을 때도 무너질 때도 포기했을 때도 나는 여전히 나였으니까. 나는 그런 것을 쓰겠습니다.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초안을 쓸 때는 대체로 음악을 듣고, 퇴고를 할 때는 고요 속에 머무릅니다.
나는 지금 음악 안에서 오르간을 누르듯 글을 씁니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더듬더듬. 그렇게.
사실, 멜로디언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쓰다 보니 오르간이 되어버렸습니다. 후-우.
4. 음악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부러워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한 컷의 스틸로 표현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재능이자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라는 것은 당연하다는 전제하에) 사람이라고는 졸라맨 정도로만 그릴 수 있는 나는 감히 엄두도 안내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나의 부족한 학식과 견문 때문인지 그림 자체로 감동을 느끼는 경우는 드뭅니다. 종종 전시회도 보러 가고 미술관도 갑니다만 아직도 미술과 나는 내외합니다. 대체로 예술에서 혹은 어떤 문화에서 내가 감동을 느끼는 지점은 서사인데, 그것이 말갛게 드러나는 서사일 때보다 유추할 수 있는 서사일 때 마음이 더 요동칩니다. 그런 면에서 음악은 글과 마찬가지로 서사를 느끼기에 좋습니다.
음악은 멜로디와 가사를 구분해 볼 때 대체로 6:4 정도의 비율로 빠져들게 되는데, 멜로디가 첫인상이라면 가사는 사랑입니다. 첫인상이 강렬했지만 끝내 사랑하지 못할 수 있고, 첫인상은 별로였지만 들여다본 가사에서 두고두고 사랑이 피어나기도 합니다. 후자일 때 나의 마음은 6:4에서 2:8 정도의 비율로 중요도가 빠르게 변하는데 그때 사랑은 더욱 짙어지고 깊어집니다. 물론 멜로디와 가사 그 모두가 내 마음에 들어온다면 나는 더할 수 없이 충만해집니다. 갓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이를 그리듯 하루 종일 그 음악만 듣게 됩니다. 다시 듣고 또 듣습니다. 반복적으로 듣지만 들을 때마다 새로운 감정을 느낍니다. 때론 그 감정이 그리워 듣기도 합니다.
음악을 만드는 것 못지않게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을 흠모하는데, 기교보다는 담백함을, 여자보다는 남자의 목소리를 좋아합니다. 얇고 높은 목소리보다 낮고 허스키한 것에 매력을 느낍니다. 부르지만 별로 부르지 않는 그런 노래가 좋습니다.
요즘 듣고 있는 음악은 '리도어(Redoor)'라는 인디밴드의 음악인데 '자연 속의 고요함을 담고 있는 밴드'라고 본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음악이 굉장히 서정적이며 약간 몽환적이기까지 합니다. 마치 '원령공주' 속 숲 속에 와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음악은 술처럼 나를 몽롱하게 만들기 참 좋은 장르임이 분명합니다. 음악과 술이 합쳐지면 그 시너지는 더하겠구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음악을 들을 때도 글이나 드라마나 영화를 대하듯 한 음악에서 시작하여 그 가수 혹은 그 작곡가의 모든 음악으로 넓어집니다. 이것은 몇 날이고 지칠 줄 모르고 계속됩니다.
작년 11월에는 '김현창'이라는 싱어송라이터의 음악에 젖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젖어 있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두 달 동안 매일매일, 하루 스무 시간 이상을 듣고 또 들었으니까요. 김현창의 음악은 말 그대로 시詩라고 생각합니다. 노래가 시라고 생각해 본 적이 참으로 오랜만이었습니다.
올해 1~2월에는 'FINNEAS'의 음악에 마찬가지로 빠져 있었는데, 영어 가사의 정서를 본연의 그것대로 다 전달받기는 어렵지만 멜로디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는 정서. 감정. 그는 정말 훌륭한 뮤지션이라고 느낍니다.
참고로 그는 'Billie Eilish'의 친오빠로 그녀의 거의 모든 곡을 함께 작사&작곡&프로듀싱했습니다.
그 외에도 'Bruno Major'나 '이강승' 등이 요즘의 내 플레이 리스트이고, 아. 집안일을 할 때, 특히 설거지를 할 때는 'Alan Walker'를 듣습니다. 움칫움칫 비트를 따라 둠바둠바 그릇을 닦습니다. 구석구석 거품을 칠하고 반짝반짝 씻어 내는 일이 들썩이는 리듬이 됩니다. 청소기를 밀거나 빨래를 개키거나 욕실을 닦는 일이 조금은 더 신나집니다. 그는 참 고마운 사람입니다. 유일하게 듣는 EDM입니다.
음악을 크게 듣는 것을 좋아하는데, 가족들이 함께 있을 때는 그것이 힘들기 때문에 집에서는 대부분 헤드폰을 끼고 있고, 한쪽 귀는 어쩔 수 없이 살짝 열어둡니다. 안 그러면 가족들이 무얼 말해도 내가 못 알아듣는다거나 혹은 내가 너무 큰소리로 대답한다고 타박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쪽 귀를 열었더니 이제는 그렇게 쉬지 않고 음악을 들으면 고막이 나간다고 겁을 주는 지경입니다. 그럴 때 나는 외칩니다. 소심하고 단호하게. MUSIC is my life~
흐흐.
나는 커피와 술과 글과 음악을 사랑합니다.
꽤 오랜 시간 그것들을 사랑해 왔습니다.
잘 알아도 잘 몰라도 취할 수 있는 것이 커피이고 술이고 글이며 음악입니다.
요란 없이, 소란 없이, 절차 없이, 격식 없이 그 모든 것을 느낄 수 있고 즐길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유홍준 교수님께서 말씀하셨고 나 또한 백 프로 공감하는 말씀이나 이것은 사랑하기 위해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므로.
나는 모를 때도 알 때도 그 모든 것을 사랑하였고, 여전히 잘 모르고 더 알려고 애쓰지도 않을 것이지만 마찬가지로 여전히 나는 그 모든 것을 즐기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