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UNJIN May 16. 2023

죽은 돼지의 피



가을이었을까. 겨울이었을까. 아무튼 밤이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억울함과 분노로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도 없이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남쪽으로 가자. 남쪽으로.


경부 고속도로를 지나 영동 고속도로.

도로는 새까맸지만 머릿속은 새하얬다.

한 시간 반쯤 달렸을까.

덕평 휴게소가 보인다.

숨 좀 쉬자.

숨 좀 쉬고 다시 달리자.

휴게소로 들어간다.

검정이 내려앉은 휴게소 마당엔 새빨간 플라스틱 테이블과 의자들만이 쓸쓸하다.


허기가 진다.

하...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구나.

고르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남아있던 음식을 샀다.

순대와 떡볶이를 먹는다.

장사 끝에 남은 음식들은 맛이 없다.

순대는 푸석하게 마르고 떡볶이는 퉁퉁 불어 뻑뻑하다.

꾸역꾸역 먹다 보니 그래도 목구멍인지 위장인지 슬슬 불러온다.

뱃속에 순대가 그득하다. 

뜨거운 커피를 붓는다.

당면이 수분을 머금고 몸집을 키운다.

요동치는 당면 사이사이를 비집고 죽은 돼지의 피 같은 숨이 몰아쳐 나온다.


하......


삼십 분 동안 그 숨을 나누어 뱉는다.

깊고 느리게.

두 달쯤 억눌러 둔 감정이었다.

분절분절 숨을 내뱉고 나니 하얗던 머릿속에 조금의 명암이 생겨났다.

남쪽으로 가려던 생각은 순대에 밀려 소화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도시도 시골도 아닌 낯선 곳에 덩그러니 내가 앉아 있다.

바람이 차다.

커피로 입을 헹구고 외로운 플라스틱 의자에 안녕을 고한다.


죽은 돼지의 피가 나를 구했구나.

영혼은 뱃속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 Image_pixabay.com >

 

매거진의 이전글 하루에 십 분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