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리뷰2 '돌봄과 위로, 배려'라는 감정노동
집에서 혼자 하늘이 노랗게 보일 정도로 아프고 난 직후에 썼던 글을 보니 뜻밖의 사랑타령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혼자 웃음이 나왔다. 조건 없는 사랑, 세상에 그런 게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무의식 중 나 자신이 끊임없이 그런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겠다. 허무맹랑할지언정, 상상하는 건 자유잖아..? 그러나 부모자식 간에서 조차 무조건적인 사랑은 없듯, 그런 건 로또 맞을 확률에 가깝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우리 엄마조차 학창시절 땐, 성적표의 성과로 나를 사랑했었다.
마찬가지로 부부 사이에서도 사랑이라고 지칭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려면 어느 정도의 ‘성 역할극’을 지켜줘야 하는 게 아직까지 우리가 처한 현실이 아닌가 싶다. 지난 번 한강의 채식주의를 언급했듯이 아내가 아내로서의 젠더의무를 이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을 때 가차 없이 버림받는 처지에 이르게 되듯, 남편 또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때 마찬가지로 경멸의 대상이 되는 건 한국의 일반적인 현상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조금씩, 아니 드라마틱하게 바뀌고 있는 부분도 있다. 앞으로 외벌이로는 자식을 제대로 키워낼 수 없는 경제적 현실 속에서 여성의 공공 영역으로의 진출이 자의로든 반 강제적으로든 늘어나게 된 현실이 그것이다. 부부의 맞벌이는 이제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어 버렸다, 어쩌면 영원히 지속될 고비용의 교육문제와 더불어 장기적인 경제 불황의 시대 속에 살면서 회사원이 외벌이로 자녀를 키워내는 일은 극한의 미션에 가까워 졌다. 아내 또한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의무가 남편과 비등해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자연스럽게 공공의 영역에서 여전히 존재하는 성차별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더 강하게 일고 있고 그로인해 많은 부분이 과거에 비해 개선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정희진 작가는 이 책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논제를 던진다. 여성의 공적 영역으로의 더 많은 진출, 그 안에서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는 건 사실은 ‘반쪽짜리 성 평등’이라는 논제가 그것이다. 여성이 공적 영역에서 공정한 기회와 평등한 대우를 받는 문제 뿐 만이 아니라, 남성이 사적영역으로도 함께 들어와야 비로소 완전한 성 평등이 실현될 수 있다고 작가는 얘기하고 있다. 근대이후로 가정이 완전한 사적 영역으로 분리되면서 아내가 전담하다 시피 하는 육아와 가사의 영역에 남성이 동등하게 들어와야 한다는 주장이다.
‘육아와 가사’ 노동이라는 무임금 노동의 핵심에는 사람에 대한 돌봄, 위로, 배려라는, 육체노동에 더한 감정노동이 들어가 있다. 보통 감정노동은 대부분의 가정 안에서 아직까지 여성이 전담하다시피 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사회가 공적 영역이든 가정 안에서든, 여성에게 요구하고 있는 큰 비중의 성역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역할전담은 여성이 사회생활을 지속하는 데에 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 아이를 낳은 후의 돌봄노동으로 인한 여성의 경력단절은 인력 채용 시, 회사에서 여성을 기피하는 주요요인이 된다. 감정노동에 대한 고정된 성역할의 차별적 요구와 그로인해 공적 영역으로의 진출을 지속할 수 없게 되는 악순환은 남성이 돌봄의 노동 영역에 완전히 들어와야 끊어낼 수 있다.
요즘 전성기를 맞은 오은영 박사의 부부상담소를 보고 있자면 이 분야에 대한 노동 할당의 불평등을 더욱 생생하게 실감할 수 있다. 거의 모든 부부의 불화에서 남편이 아내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은 놀랍게도 모두가 같았다. ‘남편에 대한 위로와 격려가 없다.’는 점. 반대로 아내의 남편에 대한 불만도 대부분 일치했는데 ‘나는 혼자 회사 일과 아이들 교육문제를 포함한 육아, 가사까지 감당해 내고 있는데 남편은 그 문제에 상대적으로 무심하다.’ 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아내의 불만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다. 아내가 그에 대한 자신의 불만을 100% 솔직하게 공개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그건 여성조차도 돌봄과 위로, 배려의 영역은 자신에게 더 큰 비중이 있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주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픈 몸으로 혼자 늙어가는 것이 두렵다고 했지만 이 문제도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여성의 경우 배우자가 있더라도 상대가 나를 돌봐줄 거라 기대하지 않는 편이 낫다. 2014년 YTN 뉴스에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 남성 암환자의 경우 배우자의 간병을 받는 비율은 96.7%, 즉 100%에 가까운 수치에 달했으나, 여성 암환자의 경우 배우자의 돌봄을 받는 비율은 27.5%에 불과했다. 게다가 여성암환자의 경우 남성암환자에 비해 이혼률이 4배에 달한다는 결과까지 나왔는데, 특히 유방암이나 자궁암을 앓은 환자일 경우 ‘여성성이 훼손되었다.’는 이유로 배우자와 관계가 멀어진다고 했다.(‘이거, 리얼 실화냐’고 소리쳤다는!) 이 얘기는 굳이 통계를 통하지 않고서라도 주변으로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던 내용이었으나 수치가 생각 이상으로 이렇게 편파적(?)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https://www.ytn.co.kr/_ln/0103_201404141523027188)
지인 중, 요양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친구는 남성 노인이든 여성 노인이든, 환자가 죽어갈 때 옆에 있는 사람 중 남성을 본 적은 없다고 말했다. 곁을 지키는 사람은 늘 여성배우자 혹은 며느리나 딸이지 그 속에 남성배우자나 아들의 자리는 항상 비어있다고 얘기했다. 하긴, 우리 고모도 뇌경색으로 요양병원에서 숨이 잦아들고 있었을 때, 난 정확히 같은 걸 봤고 들었던 터였다.
위로와 배려는 서로 해 줘야 하는 게 당연하다. 함께 사회생활을 하는 아내에게 일방적으로 바라는 건 아내를 수퍼 에너자이저(?)로 우러러보고 싶어 그러는 심리는 분명 아닐 터이다. 모든 허드렛일의 소소한 일들과 더불어 자식들의 중요한 교육문제, 여기에 가족구성원과 대화, 교감하고 위로하는 모든 감정노동의 사적인 영역에서 남성의 폭넓은 참여를 이끌어내야 한다. (공익광고는 그런데다 쓰지 뭐에다 쓰나?) 여성이 감정노동에 능숙한 것은 타고난 게 아니라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도 사랑하는 사람, 배우자의 위로와 내조가 필요할 때도 분명 있다. 영화 ‘여배우’에서 윤여정과 고현정이 ‘우리야 말로 배우자의 내조가 필요하다.’고 소리 높여 얘기했듯, ‘돌봄과 위로, 배려’라는 내조는 서로가 서로에게 해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