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울타리를 원했으나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리뷰
‘포르노의 쾌락은 여성이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응시의 대상, 폭력의 대상으로 재현되어 남성 소비자가 자신에게 권력이 있다는 느낌과 의식으로 만족할 때에 발생한다.’
성폭력은 남성의 생물학적 본능으로부터 기인하는 행동이 아니다. 그것은 ‘성별의 권력화’에서 비롯된다. 위의 문장 하나만으로 이 사실이 너무도 쉽게 설명이 된다는 걸 알고 나서 정희진 작가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이 책을 읽었던가?’ 처음 접한다고 생각했던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20대 때의 언제쯤 한번은 읽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몇 개의 문장이 언뜻언뜻 기억나는 현상(?)으로 보건대, 나는 이 책의 전반을 이해하지 못하고 읽었던 게 분명하다. 책 한권의 내용이 통째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는 건 그만큼 그 나이에 읽기엔 어렵고 버거웠던 책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회적인 현상, 특히 일상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는 성별의 권력관계, 이로 인한 구조적 성차별, 성차별이 불러오는 모든 성폭력의 형태와 맥락을 정확히 짚어낼 줄 알고 누구보다도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지만 자신의 넘치는 지성을 주체할 수 없었던 탓일까, 그가 쓴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은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재미있으면서도 동시에 내가 마치 한참 모자란 인간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다.
‘남성 지배, 남성 폭력의 성애화(性愛化)’, ‘권력관계에 종속된 사랑과 섹스’, ‘철저하게 사적 영역화 되어 무법지대가 되어버린 가정이라는 공간, 거기서 기인하는 가정폭력’, ‘성적 자기결정권과 ‘피해자다움’이라는 성역할의 충돌과 모순‘, ’페미니스트와 전면 대치했던 성판매 여성 이야기‘, ’군대문제를 둘러싼 성별 갈등의 이면‘ ’군사주의의 남성성에서 비롯된 전시의 집단강간‘ 등의 소재와 이슈 중 어느 것 하나 논하고 싶지 않은 주제가 없으나 그 중 가장 인상 깊었고, 그만큼 많은 생각이 들게 했던 몇 개의 주제에 관해 얘기해 보고 싶어졌다.
신고를 당한 성폭력 가해자들의 분노와 피해의식에 대해 나는 상상해 본 적이 없다. 죄를 지은 그들은 마땅히 자신의 추한 자화상에 대해 부끄러워 할 거라 생각했는데, 도리어 자신을 구속한 사회와 피해자에게 그 분노를 투사할거라는 생각을 할 수나 있었을까.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 걸렸다.‘는 분노, 더불어 자신을 신고한 여성을 향한 복수심은 스토킹한 여성을 결국 살해한 전주환처럼 상대방의 인격과 의지, 성적 자기결정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일종의 ’특권의식‘에서 비롯된 심리이다. ’특권의식‘이라는 건 대단한 권력계층에 있어서 생길 수 있는 개념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성‘자체만으로 상대의 성을 얼마든지 타자화하고 억압할 수 있다는 당위성에서 나오는 우월감을 얘기하는 것이다.
전주환 사건도 물론 ’지인으로부터‘ 비롯된 성폭력과 살인이지만 통계에 의하면 (2011~2016년 서울해바라기 센터 통계조사) 성범죄 사건의 70%가 지인으로부터 일어난다고 한다. 그 중 가족, 친인척으로부터 일어난 성폭력이 21%라고 하니, 성폭력이 얼마나 우리의 일상 곳곳에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무서운 건, 성폭력이 가족, 연인간의 사랑으로 ’성애화‘ 된다는 사실이다. 성애라는 속임수 뒤로 남성권력이 완벽하게 숨을 수 있을 때,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여성억압은 생물학적 질서로 간주될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래디컬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 4B (비혼, 비출산, 비연애, 비섹스) 운동이 일어나고 있는 건 결코 터무니없는 일이 아니다. 솔직히 나는 비 연애, 비 섹스까지 주장하는 건 너무 나간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작가의 글을 읽고 성폭력이 범죄자에 한해 특정된 것이 아닌, 연애와 결혼생활에까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되었다. 작가의 논리는 그 동안 나의 연애 역사를 돌이켜 보면서 쿨한 척 넘겼거나 폭력인 걸 알면서도 별 거 아니라고 간주하며 그냥 참았었던 모든 기억들이 그 자체로 억압, 일상적 성폭력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었다.
작가는 근대 이후의 결혼제도가 일상생활 구석구석으로 성폭력이 퍼지게 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했던 제도라고 평가했다. 동 서양이 다르긴 하나, 동 서양 고위층을 예를 들자면,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었던 예전의 결혼제도에서 만들어진 가정은 오히려 공적인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각 가문에서 만난 남성과 여성이 공인된 성의 결합을 통해 후손을 낳고 주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아이를 길러내는 일, 오히려 이들은 가정 밖에서 각자의 사교활동을 하며 사생활을 누렸다. (동양은 남성만이 사생활을 누릴 자격이 있었다.)
성‘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가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시점은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 이후. 부부가 서로 낭만과 에로스의 의무까지 지게 되면서부터이다. 가문의 결합이 아닌 개인의 낭만과 사랑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하여 사적으로 결합된 가정은 예전과는 다르게 공적영역에서 완전하게 분리 되었다.
그런데 이 말은 성별의 권력 불균형에서 오는 성폭력까지도 함께 사적인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간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 동물이다. 철저하게 사적 영역화 된 공간 안에서 성별 권력의 우위를 점하게 되는 남성은 너무도 쉽게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놓인 성 위에서 군림하게 되는 환경 안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가정폭력이 일어나는 건, 딱히 개개인의 악한 성품에서 기인한다기 보다는, 사회적인 맥락과 구조적인 원인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공적영역에서 분리된 사적 영역에 공권력이 좀처럼 개입하기를 꺼려하는 최상(?)의 공간이 된 가정이 ’폭력의 온상지‘가 되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경제력을 상실한 채, 남편의 폭력에 휘둘려도 가정을 떠날 수 없는 전업주부, 친부 혹은 의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력에 노출되면서도 매일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셀 수 없는 소녀들은 이런 맥락에서 만들어진다. 성폭력은 남성의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결코 아닌, 성별의 권력관계와 가정이 철옹성과도 같은 사적영역으로 분리되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어 본 적이 있을까. 작가는 세상의 모든 종류의 폭력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이 소재를 택했다고 얘기했다. 여기서 작가가 얘기하는 ’폭력‘의 의미가 정확히 소설에서 어떤 식으로 표현되어 있는지 정확히 캐치해 내는 한국 독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육식을 거부하는 채식‘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지, 그 자체에만 집중하는 건 소설이 담고 있는 의미와 작가의 의도를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작가가 단순히 동물권에 대한 자각이나 동물학대에 대한 거부를 드러내고자 ’채식주의‘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1인칭 시점이었던 영혜의 남편이 정신적으로 위험한 상태에 빠진 아내를 감싸지 않고 오히려 다그치고 밀어내고 방치하다 결국에 버렸던 일련의 행동은 아내가 자신에게 어마어마한 해를 끼쳐서가 아니었다. 지금껏 해오던 아내의 맛있는 요리를 더 이상 먹을 수 없게 된 상황에 대한 짜증, 자신을 위해 더 이상 ’섹스‘를 제공할 수가 없게 된 아내에 대한 실망이 전부이기 때문이었다. (남편은 거부하는 아내 영혜를 힘으로 제압하여 결국 매번 강제섹스(강간)를 해 내긴 하지만 말이다.)
소설이 남편의 시선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아내 영혜가 왜 정신 이상에 빠졌는지 처음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남편 시점으로 그린, 남편이 아내를 바라보는 시선과 태도를 읽어나가다 보면 영혜의 갑작스런 채식주의에 대한 집착, 정신적인 병의 이면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의 인격과 개인에 대한 몰이해와 무관심, 아내를 ’성역할‘의 영역에만 가두어 바라보는 남편의 시선은 그 자체로 억압이자 폭력이 될 수 있다. 아내가 주어진 성 역할에 충실할 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내가 자신의 역할극을 그만두기로 한 순간부터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가치마저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 안에 영혜에 대한 인간적인 존중, 사랑과 배려, 이해 따위는 애초부터 없었다. 영혜에게는 오로지 젠더와 성역할, 억압과 일상 속의 폭력만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남편의 시점으로 교묘하게 비틀어 독자가 알아채는 데 다소 애를 먹게끔 만드는 한강의 잔꾀(?)와 재주는 그의 품안으로 영예의 맨북커 상을 안겨주었다.
사실 많은 기혼여성들이 그렇게 살고 있기도 하다. 여기에 대해 한 번도 누군가에게 드러내 놓고 얘기해 본 적 없었지만 나는 이것을 주변에 존재하는 나의 엄마, 이모, 고모의 수많은 엄마와 아내들을 보고 어린 시절부터 뼛속 깊이 체득해 왔던 것 같다.
혹시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을 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우리는 성별 권력의 불균형이 만들어 낸 세계와 그 안에서 존재하는 끝없는 성차별, 억압이 존재하는 세계에 대항하고 있다. 바뀌기를 거부하는 기득권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있고 이 세계와 체제를 묵인하고 협조하는 조력자들을 적대시 할 뿐이다. 몸서리치게 싫은 이 세계를 대들보처럼 지탱하고 있는 결혼제도를 그저 거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