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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욕이 잘못했다고?(ft.피지컬)

도서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 여성선택' 에 대한 리뷰

by 이라IRA

‘여성혐오는 자신이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 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와 원한에서 출발한다.’ (우에노 지즈코의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중에서)


젠더 이슈를 얘기할 때 지나칠 수 없는 소재 중 하나가 ‘성적 욕망’에 대한 것이다. 이 책뿐만 아니라 마이케 슈토베르크의 ‘여성선택’이라는 책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끝까지 지겹도록 남성의 성적욕망에 대해서만 다루고 있는데 나중에는 글을 읽어 내려가는 나의 눈에서 신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성선택’이라는 책은 개인적인 시각으로 볼 때 상당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마치 남성의 성적 욕망을 이성의 힘으로는 제어하기 거의 불가능한 수준의 짐승적(?)본능이라 인정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들이 성욕을 지속적으로 해소할 기회를 찾지 못한다면 이 대단한(?) 욕망은 결국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발현된다고 보고 있다. 저자가 여성인데도 불구하고 어찌 그리도 잘 알 수 있는지, 난 잘 모르겠다.

나는 남자가 되어 본 적이 없어서 성적 욕망을 성별로 비교하는 논쟁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이 사회가 여성의 성욕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지하고 남성의 성욕에 대해서는 매우 적극(?)적인 승인과 더불어 상대적으로 관대하고도 포괄적으로 이해해 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관대한 승인을 받은 남성의 성욕이 여성이라는 성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야만 하는 데에서 오는 ‘성욕의 자승자박’을 얘기하는 저자는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다. (이에 대해서 두 저자 모두 동일한 주장을 펼쳤다.) 이 사회에서 어디까지나 ‘객체’와 ‘타자’로써 존재하는 여성들 없이는 자신의 욕망을 실현할 수 없을뿐더러, 나아가서는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하기 어려운 자기모순이 바로 여성혐오를 증폭시켰다고 보는 것이다. 아이러니하다 못해 그들이 다소 처연해 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과는 달리, 상대의 성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해야만 비로소 성적 욕망을 채울 수 있는 생물은 아니다.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여성은 신체 구조적으로 ‘삽입섹스’를 통해 오르가즘을 느끼는 구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성은 별나라, 달나라(?)로 가는데 굳이 남성이 필요 하지 않다. 신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왜 성별의 신체 구조를 이토록 핀트가 안 맞게 만들어 놨는지 물어보고 싶지만 어느 칼럼에서 읽었듯이, 만약 여성의 오르가즘을 관장하는 부위가 질 안에 존재한다면(이를테면, G Spot), 아이를 출산하는 순간의 고통으로 인해 생존하지 못했을 거라 했다. 맞는 말이다. 상상해 보라, 아이가 지 스팟을 짓이기고 나온다면 그 고통을 어찌 감당해 낼 수 있단 말인가. (이슬람 만행의 할례의 고통보다 더 끔찍할 것이다.)


어쨌거나. 남성의 성욕에 대해 매우 관대한, ‘여성선택’의 저자 마이케 슈토베르크는 더 나아가서 매우 충격적인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 짝을 만나지 못한 남성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이 사회는 더욱 더 성범죄가 많아지는 폭력적인 사회로 변할 것이 분명하기에, 아예 포르노와 성매매 산업을 양지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매우 이타적인(?) 해결 방안을 내 놓은 것이다. 이 주장에 대해 우리 토론자 전원의 멤버가 경악했던 건 두말 할 필요도 없었다.

‘저자가 미쳤나보다.’ ‘저자가 혹시 장성하여 짝을 찾지 못한 아들이 있는 게 아닐까?’ ‘아들이 짝을 찾지 못해서 성범죄나 살인을 저질렀나 보다.’식의 추측과 주장이 오갔다.

저자의 이런 주장에 당연히 동의하지 않는다. 어린 소녀를 화장실로 끌고 들어가 아이의 작은 신체를 처참하게 망가트렸던 조두순은 범행 직전에 ‘아동포르노’를 반복해서 봤다고 진술했었다. 왜곡되고 폭력적인 시각을 기조로 하는 포르노를 양지로 끌어올린다는 말 자체가 어패가 있는 건 물론이다.

마이케 슈토베르크가 권장(?)한 합법 포르노와 성매매 산업에 대한 이슈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황당했으나 반면에 일부일처제 사회가 된 배경에 대한 분석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만약 여성이 남성과 같은 물리적 힘을 가졌고 사회를 이루지 않는 독립적 개체로 살아갔다면, 성 선택은 100% 여성에 의한 선택으로 이루어졌을 거라는 주장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써 암컷의 선택이 없는 한, 수컷은 결코 번식을 할 수 없는 새의 세계를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암컷의 픽을 받기 위해 화려한 깃털을 뽐내며 과장된 구애 춤을 춰야 하는 수컷과 좋은 유전자를 위해 고심하여 수컷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암컷, 여기에서 그들의 암수 역학 관계는 인간세계와의 젠더 구조와는 대조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암컷에게 선택을 받아야 하는 질서라면, 더 화려한 깃털과 풍채를 지니고, 더 뛰어난 비행실력과 곤충 사냥실력을 가진 소수의 수컷들만이 여러 암컷들에게 선택을 받을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즉 많은 암컷이 소수의 우월한 수컷만을 선택하는 다처 일부제를 이루는 사회가 만들어진다. 여기에서 다수의 수컷들은 번식에서 도태된다.


‘여성선택’의 저자 마이케 슈토베르크는 인간이 본격적이고 체계적인 사회를 이루기 전인 수렵과 채집사회에서 이와 같은 성 선택이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새의 세계처럼 짝을 찾은 남성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수적인 편향과 불균형이 일어나고 그런 현상이 지속되다 보니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발생했으리라는 점을 예상할 수 있다. 피지컬 적으로 훨씬 더 우세한 남성이 힘으로라도 제 짝을 차지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농경사회에 이르러 그들 각자가 모두 동등하게 여성을 한 명씩이라도 ‘소유’하고자 하는 부자연스러운 합의로써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일부일처제로 변하는 사회에 대한 저자의 이러한 설명은 상당한 신빙성과 설득력이 있어 흥미로웠다. 일부일처제는 그저 남성의 성적 편의에 의한 부자연스러운 체제이자 더 나아가서는 젠더 폭력이다. 가부장제의 초석으로써의 일부일처제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 이 체제에 대한 재 전복이 서서히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지? 불과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사회에서는 혼기가 넘은 여성을 얼마나 이상하고 가여운 시선으로 바라봤는지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노처녀’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있다. ‘결혼하지 못한’이 아닌 ‘결혼하지 않는’ 비혼 여성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이 아니면 경제적 생존이 힘들었던 여자들의 주머니 사정이 최근에는 많이 달라졌다는 게 키포인트이다. 반드시 결혼하지 않아도 생존이 어느 정도는 가능해진 근래의 여성들에 의한 ‘성 선택’이 다시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자면 ‘짝을 찾지 못한 남성’의 수가 증가하고 있다는 뜻이 되기도 된다.

이들도 자발적인 싱글이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남성 싱글이 ‘비자발적’인 측면이 강하다는 증거는 ‘국제결혼’이라는 말로 포장하는 이상한(?) 결혼이 점점 더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만 봐도 알 수 있다. 동남아에서 여자를 돈으로 사 오다 시피 하는 국제결혼은 짝을 찾지 못한 남성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결혼이라는 걸 하고 싶어 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얼마나 간절하게 ‘자신에게 할당되는 성을 소유‘하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게 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한국여자보다 동남아여자가 더 취향저격이라서 그 먼 곳의 사람들과 결혼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더 나은 짝이 아닌, 결혼자체, 더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번식’과 ‘성의 소유’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상대가 누군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동남 아시아의 유서깊은 역사와 그들의 문화에 대한 이해는 더더욱 필요치 않다. 그들은 그저 지속적으로 성을 제공받을 수 있는 상대만 확보할 수 있다면 그걸로 그만이다.(거기에다 잡다한 가사까지 도맡아 해주니 더없이 좋다.)

결혼제도의 속성과 본질을 꿰뚫어버린 여자들이 혼인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건 어찌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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